[코너에 몰린 전경련]해체-존립 기로에
20대 국회 첫 국정감사를 사실상 집어삼킨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의혹을 밝혀줄 핵심 증인으로 1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감에 출석한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상근부회장. 이날 그는 이 답변을 20번도 넘게 하면서 자물쇠처럼 입을 닫았다. 이 광경을 TV로 지켜보던 전경련 회원사인 한 대기업 임원의 표정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요즘처럼 경제가 안 좋은 상황에서 전경련이 재계의 이익을 대변해도 모자랄 판에 반(反)기업 정서 확산의 부작용만 키우고 있다”며 “지금 같은 전경련이 필요한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이 창립 55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 때 전경련이 대기업에서 출연금을 모금하는 과정 등에 실세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일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전경련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야권과 시민단체 일부에서 들고 나온 전경련 해체론에 여권과 회원사들까지 동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전경련 해체론이 불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가깝게는 18대 대통령선거가 열렸던 2012년에 김종인 당시 박근혜 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과 정운찬 당시 동반성장위원장이 강하게 들고 나왔다. 이에 앞서 정경 유착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등장한 해체론에 전경련은 기업윤리헌장을 제정하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발표 등을 통해 생명을 연장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정경 유착 의혹은 차치하더라도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개발경제 시대의 대기업 이익단체가 필요하냐는 반론에서부터 대기업 총수들이 외면하고 있는 전경련의 위상 하락까지 재계 내부에서 존재가치에 대한 회의론이 일고 있다.
● 정권의 모금창구 전락… 회원사들 “이대론 안된다”
전경련 사무국이 좌지우지
1979년 11월 서울 여의도에 세워진 전경련 회관 준공식에서 당시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왼쪽에서 두 번째)과 전경련 회장이던 정주영 그룹 창업주(왼쪽)가 건물을 둘러보고 있다. 동아일보DB
시작은 ‘어버이연합 의혹’. 올해 4월 보수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2014년 4월부터 11월까지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판하는 집회를 여는 동안 12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돈으로 동원했으며, 이 돈을 전경련으로부터 지원받았다는 의혹이다. 청와대가 집회를 지시했다는 수준까지 번져 갔다. 물론 청와대와 어버이연합은 이를 부인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번엔 이름도 생소했던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문제가 등장했다. 전경련이 지난해 10월 19개 기업에서 486억 원을 출연받아 미르재단을 만들고, 또 올해 1월 19개 기업에서 288억 원을 받아 K스포츠재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갖가지 의혹이 불거졌다. 급기야 공공기관들이 전경련에 가입해 있는 사실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이제 전경련에 대해 “대체 뭐하는 조직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2001년 9월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40주년 기념 리셉션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부인 이희호 여사(오른쪽)가 참석해 재계 총수들과 건배했다. 동아일보DB
전경련이 ‘재계 대변인’의 대표성을 서서히 잃어가면서 재계로부터 ‘관심의 공백 상태’를 맞게 된다. 기업들이 회비는 내지만 그 활동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3년 2월, 이승철 상근부회장이 취임한다.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사무국을 총지휘하면서 재계 현안이 생길 때마다 대기업 총수들과 관료들을 수시로 찾아다니며 의견 조율을 담당한다. 청와대 및 정부와 재계의 연결고리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정치권과 재계의 중개자 역할까지 상근부회장이 맡고 있다고 전한다. 이 부회장은 1987년 6월 민주화 이후 취임한 상근부회장 중 유일한 ‘내부자’ 출신으로 내부에서는 막후 실세로 불린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아이콘으로 꼽히는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에도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전경련이 요청을 해오면 기업 총수가 이사로 있는 조직이기에 내부 검토를 깐깐히 거치지 않고 협조했다”며 “관행적으로 이뤄져 온 일이며 전경련 사무국이 사실상 모든 결정을 하는 주체가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정작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주요 그룹 총수들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기업 경영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편이다. 이번 전경련 사태에 개입할 여력은 물론이고 의지도 없다. 실제 2005년 이건희 회장이 거듭 회장직을 고사하는 등 최근엔 자발적으로 회장을 하겠다는 후보가 잘 나오지 않고 있다. 2011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는 허창수 GS그룹 회장도 연임을 원치 않았지만 후보가 없어 지난해 2월부터 내년 2월까지 세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다.
회원사들도 모르는 ‘깜깜이 운영’도 논란
전경련은 ‘시장경제의 창달과 기업 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설립 목적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전경련의 비전은 연간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씩 회비를 내는 회원사들에조차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전경련 회원사이자 국내 30대 그룹에 속하는 대기업의 한 상무는 “정권이 듣기 좋아하는 수준에서만 기업들의 목소리를 낼 뿐, 그것을 넘어서서 기업들이 원하는 목소리를 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회비만 걷어가지 회원사를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지난해 사업보고서를 보면 전경련에는 510개의 기업회원, 86개의 단체회원(공공기관 포함), 4개의 명예회원 등 총 600개의 기업과 단체가 가입돼 있다. 이들은 규모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씩의 연간 회비를 부담한다. 이들 회원사가 1년에 내는 돈도 총 400억 원 규모라고 두루뭉술하게 알려져 있을 뿐 소수의 기업을 제외하고는 얼마나 내는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전경련이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민간단체이기 때문에 외부의 감사가 의무화되어 있지 않아 스스로 공개하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전경련이 사회공헌기금이라고 해서 3조 원가량의 자금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로비 자금, 압력단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완전히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밝혔다. 전경련 측은 이런 사실을 아예 부인하고 있지만 진위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전문가들은 전경련이 현재처럼 ‘베일에 싸인’ 조직으로 남는다면 앞으로도 비슷한 의혹이 계속 불거질 것인 만큼 감독 감시 시스템을 스스로 구축하는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성규 sunggyu@donga.com·박은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