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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의 실록한의학]소심한 성격에 병까지 꼭 닮은 선조-인조 ‘이명’ 치료 어떻게

입력 | 2016-10-17 03:00:00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조선 왕 중에선 여러모로 비슷한 이가 많다. 선조(1552∼1608)와 인조(1595∼1649)도 그중 한 묶음이다. 똑같이 전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수명도 얼추 비슷했다. 여린 성정에 풍상이 끊이지 않자 그들의 마음에 고장이 생겼고 이는 결국 이명을 일으켰다. 두 임금이 앓은 질병도 똑같았던 셈.

 젊은 날의 선조는 진심을 드러낼 용기도 없었다. 사실 신하들의 기세에 눌려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거나 소화불량 증세만 호소할 뿐 정작 스트레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말은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한 것. 본인의 질환에 대해서도 “심장에 열이 있다” “심병(心病)이 생겼다”는 등 우회적인 표현을 썼을 따름이다. 선조는 평생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선조는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난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방계 왕족 중 최초로 임금이 된 인물이다. 자신 이전까지의 왕들은 모두 선왕의 직계 아들이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그는 늘 불안에 시달렸다. 신하들이 옹립한 왕이기에 언제라도 신하에 의해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던 것. ‘연려실기술’은 그의 소심하고 어두운 인간적 성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인조는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측근에 모시던 궁녀들도 왕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중략) 글을 아주 잘 지었으나, 어떤 글도 잘 쓰지 않았고 신하들의 상소문에 대답하는 비답(批答)도 내시에게 베껴서 쓰게 하여 자신의 필적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선조는 1595년(선조 28년) 8월 임진왜란의 와중에 두통과 귀울림(이명) 증세를 처음으로 호소했다. 이듬해 5월 11일에도 “왼쪽 귀가 심하게 울리고 들리지 않아 침을 맞지 않으면 낫지 않을 듯하다”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인조는 재위 24년 10월 17일 이명 증상을 호소하며 치료법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전부터 귓속에서 매미 소리가 났는데 금월 13일 왼쪽 귀에서 홀연 종치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는 가는 소리가 아니라 큰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다. 침을 맞는 것이 어떤가”라는 내용이다.

 선조나 인조 모두 이명 치료에 공통적으로 거론한 치료법은 침이다. 특히 선조는 침술로 왕의 질병을 다스렸던 침의(鍼醫)에게 크게 힘을 실어 준다. “귓속이 크게 울리니… 만약 침의가 간섭을 받아 그 기술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면 효과를 보기가 쉽지 않을 테니 약방은 알아서 하라.”

 예나 지금이나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방이고, 질병을 예방하려면 일상생활을 개선해야 한다. 이명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병이 잉태한 것이므로 이를 예방하고 치료하려면 내향적인 성격부터 고치고 희로애락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분노나 슬픔 등의 감정을 억누르면 정신적 에너지가 스트레스로 축적된다. 살다 보면 이성으로 감정을 억눌러야 할 때도 있지만, 자칫하면 이런 이성 과잉은 심신의 균형을 깨뜨려 이명을 불러일으킨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스트레스를 줄이고 이명을 치료하는 지름길이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