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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칼럼]밥 딜런을 다시 듣는 이유

입력 | 2016-10-20 03:00:00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문학은 이래야 한다’는 형식논리 파괴의 신선함
일부 문학엘리트 반발하지만 벽과 형식이 무너지는 세상
자유와 창의의 바람… 한국 사회에도 불어와야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대학 강의를 하면서 소설이나 영화 등을 부교재로 써 왔다. 문학이나 문화를 강의하면서가 아니다. 정책과 행정을 강의하면서다. 이를테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으로 행정적 권위주의를, 이문열의 ‘들소’로 국가 권력의 기원을 설명하는 식이다.

 이런저런 말이 없지 않다. 인기 위주라는 말도 있고, 정책학이나 행정이론을 희화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때로 박광수의 네 컷짜리 만화가 노벨 경제학상의 무거운 이론과 같은 무게로 소개되기도 하고, 젊은 화가의 그림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교과서적 ‘형식’을 넘어 문제를 좀 더 넓고 깊게 보자는 것이다. 또 ‘아는’ 것을 넘어 ‘느껴’ 보자는 뜻이기도 하다.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어떠한 이론이나 방법도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과 지식의 객관성에 대한 회의(懷疑), 그리고 진리는 그런 지식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만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다.

 이런 생각들 때문일까? 14일 아침,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밥 딜런이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달리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노벨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확 다가왔다.

 좋아하던 노래였다. 개인적으로 영화 ‘헤어(Hair)’와 함께 자유와 평화의 정신을 가장 깊이 느끼게 해 준 작품이기도 했다. 서유석이 번안해서 부른 ‘파란 많은 세상’까지도 무척이나 좋았다.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원곡의 정신을 다 담을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신선한 충격’은 좋아하는 노래가 상을 받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문학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형식논리의 파괴, 그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가 문학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그것도 문학 엘리트들이 아닌 대중의 눈과 감성으로 정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점이 놀라웠다.

 사실 대중은 어디까지가 문학이고 어디서부터가 아닌지를 따지지 않는다. 밥 딜런의 노래에서 대단한 시적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위대한 시인들의 시에서 감동적인 음률을 느낄 수도 있다. 형식과 격은 문학 엘리트들의 문제이지 대중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대중의 이러한 감성이야말로 존중될 이유가 있다.

 그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이번의 결정은 문학이나 예술 영역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대중혁명이다. 그것을 다른 상도 아닌, 최고의 권위를 가진 노벨 문학상이 일으켰다. 어떤가? 놀랍고도 신선하지 않은가?

 당연히 반론이 거세다. 노래는 노래일 뿐, 형식과 격에 있어 문학이 아니라는 거다. 일례로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로 마약 중독자들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 ‘트레인스포팅’을 쓴 어빈 웰시는 “사전에서 문학이 무엇이고 음악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입에 담긴 힘든 말로 이번 결정을 비하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대중이 느낀 신선한 충격에 묻히고 있다. 오히려 대중이 이들 비판적 인사에게 묻는다. 밥 딜런의 노래에 붙여서 말이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감동해야 시(詩)를 시(詩)라 하겠나.”

 이번 일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그래서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형식논리들 때문이다. 대학 강의와 문학은 이래야 하고, 박사학위 논문의 두께는 이 정도가 되어야 하고,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대중가요 공연을 해서는 안 되고, 고급 골프장에서는 ‘자켓’을 입어야 하고… 이런 따위들 말이다.

 때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기도 한다. 강사료는 강의의 질이 아니라 강사의 직급에 따라 매겨지고, 학생이 교수에게 물 한 잔 주는 것까지 범죄로 규정하며 사제 간의 관계를 획일화시키고 있다. 오죽하면 이러겠냐마는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은 어쩔 수가 없다.

 세상 곳곳에서 우리를 가두고 있던 벽과 형식이 무너지고 있다. 자유로운 이동과 새로운 결합이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다. 융·복합의 바람과 자유와 창의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바람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기분이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밥 딜런을 찾는다.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 이번 결정을 혹평했다고 한 바로 그 웰시가 말한 ‘히피의 중얼거림(gibbering)’이다. 그는 여전히 자유롭다.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bjkim36@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