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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왜곡 자초한 정치권

입력 | 2016-10-20 03:00:00

[머리 위의 북핵 대응전략 바꾸자]




▼ 진보정권 ‘北 퍼주기’ 교류 순수성 흠집 ▼
사회적 합의없는 대북지원 논란… 北 ‘대화 대가’ 요구하는 계기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북한과의 화해·협력이라는 신종 북풍(北風)이 불었다. 2000년 총선 사흘을 앞두고 1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고, 2007년 대선을 코앞에 두고 2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2000년 대북 비밀송금 사건이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북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2002년 대선을 앞둔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6·15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에 거액을 송금했다고 주장했다. ‘대북 퍼 주기’ 논란이 커지면서 대북 송금 특검법이 통과됐고 이듬해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은 대북 사업을 추진하던 현대그룹을 통해 이뤄졌다. 현대그룹은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6월 12일 7개 대북사업 독점권을 획득하는 대가로 4억5000만 달러를 북한에 송금했다. 홍콩 마카오 등 북한 해외 계좌를 통해 ‘쪼개기 입금’이 됐고 국가정보원이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뇌물수수와 직권 남용 혐의로 구속했고 이 와중에 조사를 받던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 투신했다. 2004년 대법원은 4억5000만 달러가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독점권 대가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박 전 실장이 현대그룹으로부터 150억 원을 받았다는 뇌물수수 혐의에도 무죄를 선고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의 만남에 감격했던 국민은 대북 지원 과정이 사회적 합의 절차 없이 몰래 진행됐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경제협력을 통해 남북 간 신뢰가 쌓이면 군사적 긴장이 완화될 것이란 기대도 무너졌다. 특히 북한이 남북 교류에서 ‘뒷돈’을 요구해 남북 관계가 왜곡되는 계기가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 보수정권 ‘긴장 증폭’ 안보 불신 부추겨 ▼
김현희 압송… 간첩단… 총풍… 대선때 ‘정치조작’ 의심 불러

   보수정권은 ‘북풍(北風)’을 이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역대 대선마다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면 보수정권이 승리하는 공식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13대 대선을 앞둔 1987년 11월 29일 인도양 상공에서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고로 115명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바레인에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안보 위기를 느낀 국민의 상당수가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선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1992년 10월에는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황인오 씨 등 60여 명을 구속하며 남로당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14대 대선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이기고 당선됐다.

  ‘총풍(銃風)’ 사건은 북풍의 실체가 밝혀진 사건이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1997년 12월 15대 대통령선거 직전. 장석중(대호차이나 대표) 오정은(전 청와대 행정관) 한성기(전 진로그룹 고문) 등 ‘총풍 3인방’은 1997년 10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한 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박충 참사와 접촉했다. 이들은 옥수수 박사 김순권 씨의 방북 대가로 판문점에서 총격전을 벌여 달라고 요청했으나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선 이듬해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여당은 “고문에 의한 조작극”이라고 역공에 나섰으나 2003년 대법원은 ‘총풍 3인방’에게 징역 2∼3년, 집행유예 3∼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비록 무위에 그쳤다고는 하나 북풍이 기획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 사건은 ‘혹시나’ 했던 국민이 안보불감증을 키우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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