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구순 맞은 김남조 시인
김남조 시인은 “인간의 삶은 모두가 한 권의 책이고 보물창고”라며 “그런 인간의 삶을 더듬어 실을 뽑듯 언어를 뽑아내 시를 짓는 게 시인의 일”이라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웃음을 띠면서 기자를 맞은 그와 함께 전시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영인문학관 전시실에는 시인의 ‘사랑초서’ 육필 시집, 자선시(自選詩) 서화첩, 관련 기사 등이 전시돼 있다. 11월 2일까지 열리는 ‘시와 더불어 70년―김남조 자료전’ 전시회다.》
나그네 ―김남조―
내가 성냥 그어
낙엽더미에 불 붙였더니
나그네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입고 온 추위를 옷 벗고 앉으니
두 배로 밝고 따뜻했다
할 말 없고
아까운 불길
눈 녹듯이 사윈다 해도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내가 불 피웠고
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
내 마음 충만하고
영광스럽기까지 했다
이대로 한평생이어도
좋을 일이었다
시인은 올해 우리 나이로 구순을 맞았다. 그 아흔 해 중 70년 가까이 시를 써왔다. 전시실에선 3년 전 펴낸 ‘심장이 아프다’를 비롯해 17권의 시집도 만날 수 있다. 전시의 소감을 묻자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반으로 나누고 어느 쪽이 좋았느냐고 하면, 나는 후반을 택할 겁니다.” 20대에 첫 시집 ‘목숨’을 낸 이래 부단히 시작(詩作) 활동을 해온 그이지만, 시인은 젊음으로 빛났던 20, 30대가 아니라 40대부터가 좋았다고 했다. “40대가 되니 어린아이의 발성기같이, 목청이 트이는 것같이 감정이 폭발적으로 뿜어 올랐어요.” 그 격렬한 감정들이 오롯이 시로 향했음은 물론이다.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때를 돌이켜 달라고 청했다. 나라가 암울한 상황에서, 어리고 젊었던 그에게도 눈물이 많던 시기였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폐가 좋지 않아 한 학기 쉬었습니다. 그때 타고르 시집을 만났어요. 껍질을 벗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먹을 음식, 내가 마실 물이 큰 줄기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내 마음도 글로 써봤고요. 자연스럽게 문학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시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한순간도 식지 않았을 것 같은 그이지만 “시가 쓰이지 않던 때도 있었다”고 말한다. “에세이를 쓰는 동안은 시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시에 온 정을 주지 않고 다른 데 마음을 두면 시가 안 되더군요.” 그는 “시인은 시를 이기지 못한다. 시가 나보다 더 크고 강하고, 나보다 항상 앞에 간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전시품 중 올림픽 선수단 수첩 38개가 눈에 띈다. 38개국 언어로 번역된 시인의 시 ‘깃발’이 실린 수첩들이다.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감독을 맡았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선수단 수첩에 시 한 편은 있어야 한다며 김남조 시인에게 청탁해서 쓰게 됐다. 그는 이 수첩들을 비롯해 그간의 인터뷰와 대담 기사도 꼼꼼하게 모아 왔다. “덕분에 전시회가 풍성해질 수 있었다”고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귀띔했다.
그에게서 시는 계속 솟아나온다. 계간 시인수첩 가을호에도 ‘나그네’와 ‘눈물’ 두 편을 발표했다. 화려하지 않은 시어로 담담하게 써내려간 작품들이다. ‘내가 불 피웠고/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내 마음 충만하고/영광스럽기까지 했다//이대로 한평생이어도/좋을 일이었다’(‘나그네’에서) “문학적 도덕성의 하나는 정직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번쩍거리지 않게, 무리 없이 디밀려 오는 언어로 써야겠지요.” 산문의 시대라고는 해도 시의 지속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면서, 그는 “3000년 전의 시는 오늘도 마음의 양식이 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1000편의 시를 썼다 해도 1001번째 시를 쓸 때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임하게 된다는 그는 현역 시인이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