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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공포’ 부산은 쏙 뺀 반쪽훈련

입력 | 2016-10-20 03:00:00

전국 최대규모 지진대피훈련 ‘졸속’




대피하고… 물건 팔고… 19일 전국적으로 지진 대피 훈련이 실시된 가운데 서울 강동구 한영고 학생들이 머리 위로 가방을 올린 채 교실 밖으로 대피하고 있다(위 사진). 같은 시간 서울 영등포 지하상가에서 일부 상인이 훈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홍진환 jean@donga.com·박성민 기자

 19일 오후 2시 지진 발생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지하상가에 “밖으로 대피하라”는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쇼핑 중이던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다 쫓기듯 상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가 직원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지시에 멀뚱멀뚱 휴대전화를 만지거나 남아 있는 손님들을 맞았다.

  ‘가만히 있으라’ ‘밖으로 나가라’ 외에 더 이상의 안내는 없었다. 비상구를 지키던 공무원에게 “상가 밖으로 나가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자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진 발생 때는 건물 붕괴를 피해 운동장이나 공원 등 넓은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곳을 안내하는 직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훈련 매뉴얼에 이런 구체적인 대피 요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손님은 모두 내보내면서 대피 방법은 가르쳐 주지도 않고, 뭐 이런 훈련이 있느냐”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전국에서 9만 명 참가했다는데…

 지난달 경북 경주시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한 뒤 처음으로 이날 제403차 민방위의 날을 맞아 역대 최대 규모의 지진 대피 훈련이 전국에 걸쳐 실시됐다. 국민안전처는 군인 경찰 소방서 등 공무원 5만1619명과 지역 주민 2만439명이 훈련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민방위 대원과 봉사단체 회원까지 더하면 약 9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인력과 장비를 대거 투입한 곳을 제외하면 이날 훈련이 제대로 이뤄진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강원도청에서는 상주 직원 900여 명 가운데 150여 명만 안내방송에 따라 건물 밖 주차장으로 대피했다. 대다수는 책상 밑으로 대피한 뒤 그냥 자리에 남았다. 재건축으로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인 서울 강동구 아파트 단지에는 시민 1200여 명을 포함해 3000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됐다. 참가자들은 경기 광주시에서 규모 6.8의 지진이 발생한 상황을 가정해 대피하는 훈련을 했다. 하지만 신기한 듯 휴대전화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훈련을 지켜본 시민들의 반응도 냉랭했다. 구체적인 행동요령이 빠진 ‘맹탕 훈련’에서 배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영등포역 지하상가에서 대피훈련을 지켜보던 서영훈 씨(76)는 “오늘 훈련은 예전 민방위 훈련보다도 못한 것 같다”며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공무원들의 적당주의가 팽배한 것 같다”고 말했다.


○ 국민안전처는 서울안전처?

 훈련 상황뿐 아니라 준비 과정의 졸속 정황도 곳곳에서 포착됐다. 부산시는 6일에야 민방위 훈련을 지진 대피 훈련으로 대체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준비할 시간이 촉박해 경찰과 소방당국의 협조도 얻지 못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1∼4학년 학생 대부분은 훈련이 시작되기 전 수업이 끝나 학교에 없었다. 부산시 관계자는 “서울에서는 민관군 합동으로 대대적인 훈련을 한다는데 정작 지진 공포에 떨었던 지역은 소외시킨 셈”이라고 꼬집었다.

 이날 훈련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낙제점이었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정부나 시민들 모두 ‘대충 시간이나 때우자’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훈련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미국처럼 불시에 진행하는 방식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계명 국민안전처 비상대비민방위정책관은 “국민 불안감 해소를 위해 다소 서둘러 진행한 측면이 있다”며 “이번 훈련의 문제점을 분석해 지진 대피 매뉴얼을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박성민 min@donga.com·최지연 /부산=강성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