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옥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청탁금지법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의 입법자나 국민은 여전히 룰 방식에 얽매여 있다. 자본시장법도 그렇다. 자본시장법의 제정은 흩어진 규제를 모으는 것을 넘어 금융투자업의 겸영화 및 대형화를 통해 한국 금융을 선진화하려고 한 시도였다. 포괄주의 방식, 네거티브 규제(최소한의 금지 사항 이외에는 모두 허용)로의 전환은 획기적이란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자본시장의 현실을 보면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금융회사나 감독당국 모두 룰 방식 규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가 있다. 자본시장법 제정 시점에 닥쳐온 금융위기로 투자자 보호 측면이 강조되면서 정책 기조에 혼선이 있었다. 감독당국은 숨은 규제를 이용해 권한을 유지했고, 금융회사들도 창의성을 발휘해 경쟁하는 어려운 길보다 규제에 순응하는 쉬운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현재의 복잡한 사전 규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자본시장 선진화를 달성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원칙 중심 규제는 규제 철학의 변화를 의미한다. 사전 감독보다 사후 책임 추궁에 방점을 둔다. 감독당국의 사전 승인은 지금보다 줄이되 사후적으로 적발된 문제점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과징금, 영업인가의 철회, 임직원의 징계 등 보다 엄한 책임을 묻게 된다. 금융회사들의 부담은 커진다. 금융회사들로서는 지금처럼 정해진 틀에서 안주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국제적 거대 금융그룹을 따라갈 수 없다.
혹자는 한국 금융산업의 현실상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자본시장법 제정으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해서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조금씩 스탠더드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각 경제 주체의 제도 운영 역량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송옥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