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이종석 기자
남이 시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나선다는 말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인터넷판에서 이 단어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예시어는 ‘자진 사퇴’다. 그리고 인터넷 뉴스 검색창에 ‘자진 사퇴’를 입력하면 요 며칠 사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염경엽이다.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 감독이던 염경엽은 17일 LG 트윈스와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져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계약기간이 1년 남아 있던 염경엽은 그날 바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휴대전화에 메모해 놓은 소감을 굳은 표정으로 읽어 나가던 염경엽은 이렇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 우승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량이 부족했다. 구단과 팬에게 정말 죄송하다. 실패의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 그러면서 “오늘로 감독직을 물러난다”며 “프로의 세계에서 영원한 건 없다”고 했다.
염경엽의 자진 사퇴를 두고 순수성을 의심하는 시선이 일부 있다. 이미 특정 팀으로부터 감독 자리를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넥센 구단의 대표와 사이가 틀어져 어차피 잘릴 줄 알고 선수(先手)를 쳤다는 얘기도 들린다. 특정 팀 감독 내정설에 대해 염경엽은 “그럴 일은 없다”고 분명하게 얘기했다. 당장은 다른 팀에 갈 수도 없다. 소속 팀과 계약이 끝나지 않은 감독이 스스로 사퇴하면 남아 있던 계약 기간 동안 다른 팀에 가지 못한다. 계약 기간이 남았는데 자진 사퇴하는 건 계약 파기다. 이 때문에 염경엽은 내년 치 연봉(3억5000만 원)을 받을 수 없다. 구단이 소송을 걸어 계약금(3억5000만 원)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있다. 어차피 잘릴 것으로 여겼다면 구단이 해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내년치 연봉을 챙길 수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염경엽의 자진 사퇴를 굳이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지 싶다.
감독들의 자진 사퇴가 꼭 프로 팀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이던 임영철도 계약기간을 채우지 않고 지난달 물러났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메달 획득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던 가오훙보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성적이 추미(球迷·중국 축구대표팀 서포터스의 별칭)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자 2주 전 지휘봉을 내려놨다. 모든 감독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목과 국가를 불문하고 기대 이하의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이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다. 감독은 선수 영입과 기용, 훈련, 경기 전술과 작전까지 팀 운영과 관련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자리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감독이 결과에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최근 며칠 사이 뉴스 검색 창에 ‘사퇴’를 입력하면 ‘자진 사퇴’ 못지않게 많이 보이는 말이 ‘결국 사퇴’였다. 어떻게든 자리를 한 번 지켜보겠다고, 버티고 뭉개다가 끝내 물러났다는 바로 그 ‘결국 사퇴’. 어쨌든 제 발로 물러났다는 얘기지만 감독들의 ‘자진 사퇴’와는 차원이 다르다. 말(馬) 타는 재주를 인정받아 승마 특기생으로 입학한 한 학생의 문제를 두고 재학생과 교수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대학 총장이 물러났겠나. 그럴 리가 없지 싶다. ‘결국 사퇴’는 그냥 쫓겨난 걸로 봐도 무방하다. ‘당장 사퇴.’ 이것도 많이 나온 말이다. 사퇴를 하라고, 제발 좀 하라고, 여기저기서 노래를 부르는데도 꿈쩍하지 않고 고래 심줄처럼 버티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각 물러나라는 얘기다.
스포츠 쪽에서 취재를 오래 하다 보니 무디어져 그런지 그동안 자진 사퇴하는 감독들을 봐도 “또 하는구나”, “그럴 수밖에…” 하고 말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감독이라면 “안타깝네…”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감독들의 자진 사퇴가 요즘 들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목매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 감독들이 높이 보인다. ‘결국 사퇴’, ‘당장 사퇴’ 같은 경우에 비하면 성적은 좀 시원찮았어도 핑계하지 않고 물러난 감독들이 멋있어 보일 지경이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