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무자비한 ‘마약과의 전쟁’과 거친 입담으로 국제적인 뉴스 메이커가 됐지만 이번엔 정말 예사롭지 않다. “이제 미국과 작별을 고할 시간”이라며 “다시는 미국의 간섭이나 미국과의 군사훈련은 없다”고 19일 선언했다. 그것도 중국을 국빈 방문해 극진한 대접을 받고 한 발언이다. 남중국해 문제로 갈등을 빚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선 “지금은 봄날”이라며 동맹 관계인 미국에 얼음물을 끼얹었다.
▷두테르테는 지난달엔 “필리핀은 미국의 속국이 아니며 오래전 미국 식민지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취소할 의도가 없다”면서도 “정말로 우리가 그걸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음표를 던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그가 미국에 각을 세우고 중국에 가까이 가려는 것은 두 나라 사이에서 필리핀의 몸값을 높여 좀 더 많은 실리를 챙기기 위한 계산된 행보라는 분석도 있다.
▷소국은 강국의 힘이 필요할 때 동맹을 원한다. 그러나 월등히 강한 국가와의 동맹은 강국에 더 유리할 가능성이 크므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맺지 말라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지적했다. 필리핀 정치학자들이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부르는 두테르테가 이 영향으로 미국과 거리를 두는 것인지 모르겠다. 1992년 미군이 필리핀에서 철수한 뒤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다 잊었는지도 궁금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2002년 9월 “미국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또 반미주의자면 어떠냐”는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집권 후 외교안보 라인에선 ‘자주파’와 ‘동맹파’가 충돌했고 한미동맹은 요동쳤다. 국제정치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한스 모겐소는 1948년 초판이 나온 ‘국가 간의 정치’에서 가급적 체결하지 말아야 할 강대국과 약소국의 동맹 사례로 한미관계를 꼽았지만 지금 살아 있다면 아마 그 부분을 수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한 두테르테는 한국 사례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