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논설위원
김재규, 최태민에 분노해
“그(김재규)는 박근혜 양을 붙잡은 ‘목사’ 최태민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김재규는 각하(박정희)에게 최의 비리를 보고했으나 박근혜 양이 최를 비호해 각하 앞에서 대질 친국(親鞫)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천하의 정보부장이 ‘사이비’ 목사와 나란히 앉아 우김질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굴욕이었다. … 대통령 식구들, ‘로열패밀리’ 때문에 생긴 김의 스트레스도 10·26의 한 원인이었다고 당시 정보부 국장들은 증언하고 있다.”
시해 사건을 조사한 합동수사본부의 기록에 나타난 정보부 국장의 진술은 이렇다. “김 부장은 ‘최태민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는 1972년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영 박정희’와 ‘올드 박정희’로 구분된다. 그가 무력으로 집권한 독재자란 사실은 같지만, ‘영 박정희’는 민족을 가난에서 구하고 근대화를 달성하겠다는 열정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남의 말을 충분히 들었고, 때론 반대 의견도 수용하며 능률적인 통치를 해나갔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듯, ‘올드 박정희’는 권력에 취했다. 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에는 더 나빠져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통치보다 권력 유지에 집착했다. 대통령 주변의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대해 진언하면 비판받은 당사자에게 ‘내부 고발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식이었다. 권력 핵심부가 곪을 대로 곪아 갔다.
10월 유신 때 박근혜 대통령은 스무 살이었다. 육 여사 서거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정치를 배웠다. 통치에 능했던 ‘영 박정희’보다 권력에 집착했던 ‘올드 박정희’에게서 정치를 배운 것이 오늘날 박 대통령 비극의 출발점이다. ‘올드 박정희’는 고독했고, 그럴수록 몇몇 측근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부모를 모두 총탄에 보낸 박근혜 대통령도 고독했고, 그럴수록 최태민-최순실 부녀 같은 ‘사이비류(流)’에 의지했다.
차기 대통령의 자격
이번 ‘최순실의 난(亂)’을 겪으며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한국적 대통령제가 지속되는 한 차기 대통령은 무엇보다 심각한 ‘트라우마’가 없어야 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대통령직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국민과 같은 눈높이에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