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아니라… 한국판 라스푸틴의 딸 비선실세가 국정 주무른 나라… 측근비리로 끝나는 불행한 대통령 30년간 6명이면 실패한 제도 가난한 키르기스스탄도 하는 내각책임제 개헌 어떤가
김순덕 논설실장
그런데 반동(反動)의 기운이 느껴진다. 지난주 통일부가 “개성공단 중단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확정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전날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이 “최순실과 차은택, 호스트바 출신 고영태 등이 비선 자문회의에서 논의했다”고 폭로한 걸 뒤집은 것이다. “최순실 취미가 대통령 연설문 고치는 것”이라고 터뜨려 대통령이 사과까지 하게 만든 고영태도 그런 말 안 했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급기야 독일에서 신경쇠약에 걸려 비행기를 못 탄다던 최순실까지 어제 아침 급거 귀국해 검찰 조사를 자청했다. 2014년 말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이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으로 둔갑한 것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다.
최순실 국정 농단도 태블릿PC 유출 사건으로 낙착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나도 좋겠다. 하지만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만들 순 있어도 한 번 알아버린 것은 모르는 것으로 돌리진 못한다. 워싱턴포스트가 ‘기념비적 연설’이라고 언급한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마저 최순실이 손을 봤다니 표현만 다듬은 건지, 평화통일 구상까지 해준 건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대통령을 대체 어떤 마력으로 사로잡았는지 최순실은 ‘내 딸이 행복해지는 나라’를 위해 대학입시와 130년 전통의 사학(私學)까지 뒤흔들었다. 대통령에게 최순실이 역린(逆鱗)이면 학부모와 학생들한테는 대입이 역린이다. “능력 없으면 너네 부모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는 싸가지 없는 말로 열심히 살아온 국민을 모욕한 것만으로도 최순실 딸과 그 부모, 그리고 대통령은 석고대죄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검찰 수사마저 은폐 축소될 조짐이니 ‘헬조선’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다.
내각책임제 같으면 벌써 내각 총사퇴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책임제에선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 대선 후보 측근들은 5년에 한 번씩 역성혁명 하듯 왕을 만들어 내고 집권하면 국가를 사유화하는 것이 대통령제의 폐해다. 민주화 이후 30년간 6번의 대통령이 측근비리와 부패 끝에 불행한 퇴임을 한 것이 그 증거다. 이번엔 대통령이 측근 부패의 재단을 차려주는 막장까지 왔다면 대통령제는 이제 끝내야 한다.
우리 국회 수준으로 내각책임제 할 수 있을지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3년 11월 19일 민주당 의원과 청와대 경호요원의 몸싸움으로 마침 파행 중인 국회를 찾았던 대통령이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내각책임제 국가인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귀빈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엉덩이에 몽고반점 있고, ‘씨족사회 전통’에 옛 소련으로부터 대통령제 국가로 독립한 뒤에도 부패와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 가난한 나라는 2005년 ‘튤립혁명’으로 14년 장기독재 대통령을 몰아냈다. 혁명을 이끈 야당 지도자마저 부패한 다음 대통령으로 돌변하자 2010년 대통령을 쫓아냈고 과도정부가 들어서 내각책임제 개헌 국민투표를 거쳐 2011년 평화적 정권교체를 했다. 그리고 2015년 두 번째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의회민주주의의 안정성과 정책의 연속성을 굳혀가고 있다.
이름도 입에 올리기 고약한 병신년(丙申年) 2016년,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비선·부패·섹스 스캔들은 대통령제를 시해(弑害)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으면 한다. 유력 대선 주자가 없는 지금, 거국내각이든 책임총리든 남은 1년 4개월 동안 내각책임제 개헌까지 해낸다면 박 대통령은 어쨌거나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