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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마을①] 상상 속 용은 현실이 되다

입력 | 2016-11-01 05:45:00

■1 전남 고흥 영남면 우천리 용암마을에는 승천의 꿈을 품에 안은 용의 발자국(용바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 용꼬리가 휘어져 돌아간 자리에 연못이 만들어졌고, 간천마을 사람들은 연못의 일렁이는 물결로 날씨를 가늠하며 농사를 지었다. ■3 용바위를 떠받치는 드넓은 반석 위에 용의 발자국처럼 깊게 팬 흔적이 눈에 띈다. 김진환 기자 kwangshin@donga.com


■16. 우천리 간천·용암·우암마을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격주 연재한다.

여의주 얻기 위해 싸운 청룡과 황룡
연못 주변 들판에 터를 잡은 사람들
용이 승천한 자리엔 용바위가 우뚝
마을 지켜주는 용두암 ‘하늘의 선물’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설화 가운데 유독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용은 상상 속에만 등장하는 신성한 영물. 그만큼 인간세상의 희망과 바람, 성취, 염원 등 그 간절함을 안고 있는 게 아닐까. 고흥군 영남면 우천리 간천·용암·우암마을에도 용에 얽힌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고흥 10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팔영산 자락의 산촌마을로, 실제로도 곳곳에서 용의 형상과 그 흔적이 고스란한 바위를 발견할 수 있다. 고흥에서 가장 높은 팔영산을 뛰어넘어 승천하는 용의 이야기에는 마을사람들의 희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하다.

● 용추…마을의 기원

팔영산에서 발원한 개천물은 동북쪽으로 향하며 간천마을을 지나 여자만으로 흘러든다. 그 초입에 큰 연못이 있다. 용추(龍湫)다. 청룡과 황룡,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얻기 위해 싸운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류한옥(54) 이장은 “용 꼬리의 힘이 얼마나 센지 내려치며 휘어져 돌아간 자리에 연못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면적 4958m², 둘레 1km가 넘는 용추는 분지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연못의 기원은 간천마을의 입향(入鄕·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터를 잡고 정착한 사람)의 설화로 거슬러 오른다. 고흥 류씨의 옛 조상으로 추정되는 류시인이 간천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다. 무예와 활쏘기 재주가 뛰어난 류시인의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연못에 살고 있는 두 마리 용이 등천할 때가 왔다. 그 중 한 마리를 쏘아 죽여라. 그렇지 못하면 이 마을에 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류시인이 활로 황룡을 쏘아 죽였고, 며칠 후 연못 옆에 큰 들판이 생겼다.

들판을 삶의 근거지로 삼은 사람들은 연못의 기운에 한 해 농사를 기댔다. 류제동(75)·정현(71)씨 형제는 “마을에 가뭄이 들면 연못의 물을 대 밭농사를 지었다”고 밝혔다.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날씨의 운도 연못으로부터 읽었다. 마을사람들은 용추의 물결이 해일처럼 일어나 노도(怒濤)를 일으키면 비가 내렸다며 “지금도 그렇다”고 믿는다. 류씨 형제는 “예부터 용추의 물결을 보고 날씨를 점쳤다”고 말했다.

● 용바위…승천의 꿈을 품에 안아

간천마을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자리한 용암마을에도 남해바다의 용암동굴에서 해룡이 암벽을 타고 승천하며 발자국을 남겼다는 형상이 있다. 용바위다. 오랜 세월 겹겹이 그리고 견고하게 쌓인 암벽을 긁고 오르려 한 용틀임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다.

용바위 바로 옆에 사는 박점수(73)씨는 “날 좋은 날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더니 용이 바다에서 승천했다더라”며 “용이 살던 용암동굴에 파도가 부딪히면 30리(약12km) 떨어진 곳까지 ‘울음소리’ 같은 게 들린다”고 했다. 비가 올 때면 바람 따라 ‘윙윙’거리는 소리가 면사무소까지 들린단다. 박씨는 “30리 밖 사람들이 듣고 ‘오늘은 날이 궂네, 아니네’ 하는데 우리는 잘 안 들려, 잘 몰라” 허허 웃는다.

용의 흔적은 인근 마을 농사꾼들에게도 긴요한 소리로 남은 셈이다. 소리는 역시 날씨의 궂고 아님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터전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그 절경의 아름다움을 안겨주었으니, 영물로서 용은 그 역할을 다한 건 아닐까. 용바위를 감싸고 드넓게 펼쳐진 남해바다의 풍광은 실제로 고흥 10경 중 6경으로 남았다.

용바위는 그 자체로도 661m² 너비의 반석을 밑받침 삼으며 사람들 나들이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발에 닿을 듯한 거리에선 파도가 찰랑거리고, 뒤로는 암벽이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솟아있으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유유자적하기 딱 좋겠다. 반석 아래로 갯바위 낚시를 하기에도 맞춤해 낚시꾼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

● 용두암…마을의 수호신

용은 그 자체로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부터 사람들은 상상 속 영물에 기대 소원을 이루려 했다. 용암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용두암은 그 구체적인 형상이다. 용의 머리를 닮은 큰 바위도 마을사람들의 소원이었다.

이미 하늘로 오른 용을 보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 머리라도 보고 싶어 했다. 꿈 속에 나타난 용은 머리를 닮은 큰 바위를 선물처럼 마을에 안겨주었다는 설화. 그래서 사람들은 용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는다.

믿음은 또 다른 기원의 소망을 낳는 걸까. “날마다 빌고 또 빌지”라며 웃는 박점수씨는 “매년 1월1일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해 무속인들까지 몰려오고. 시험을 보는 자식을 위해 부모들이 찾아와 용두암에 정성을 들인다”고 말했다.

고흥(전남)|이정연 기자 annjo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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