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울산 검단리 유적 발굴한 안재호 동국대 교수
지난달 26일 울산 검단리 유적에서 안재호 동국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청동기시대 환호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울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990년 당시 촬영한 울산 검단리 유적 발굴 현장. 사각형의 주거지 유구 주변을 원형으로 감싼 환호가 보인다. 안재호 교수 제공
○ 일본 청동기문화 한반도 전래 입증
“이쯤에서 끝나야 하는데 거참 이상타….”
그의 직관은 적중했다. 유구를 이어보니 휘돌아나가는 너른 구덩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전형적인 환호였다. 수많은 환호가 발견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그때까지 한반도에서는 환호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 학계는 자신들의 청동기문화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넘어왔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의 고대 철기문화도 삼한이 아닌 낙랑에서 넘어왔다고 설명하는 등 가급적 한반도 도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학계의 태도가 반영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울산 검단리를 계기로 전국에서 30여 기의 환호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일본 학계는 한반도의 영향을 부인하기 힘들게 됐다.
환호 발굴 직후 국내 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환호 안팎에서 수습된 청동기나 석기의 수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유구 간 맥락을 통해 사회상을 유추하기보다 유물을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일본학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 등 일본 학자들이 검단리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와 환호의 형태부터 주거지 개수까지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2년 뒤 검단리 발굴 성과는 주요 학술지인 ‘일본 고고학 연구’에 다양한 컬러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게재됐다.
○ 한일 환호의 차이점은
검단리 환호는 주변 유구의 양상을 감안할 때 존속 기간이 불과 한 세대(약 30년)에 불과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수백 년에 걸쳐 환호가 2중, 3중으로 계속 확대되는 일본 환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또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환호 내부의 주거지 수가 적어 쉽게 폐기될 수 있었던 점도 특이하다. 현장을 방문한 하루나리 교수도 검단리 환호 내 주거지가 21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검단리에서의 환호 발굴은 유적층 위에 쌓인 퇴적층을 굴착기로 걷어내 전체 유구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집중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 발굴 현장에 중장비를 동원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안재호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흙을 걷어냈다면 둘레 300m, 면적 6000m²에 이르는 환호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아쉬움은 남는 법. 검단리 발굴에서 후회되는 게 있는지 물었다. “당시 환호 안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버린 각종 쓰레기들이 쌓였을 겁니다. 음식물부터 꽃가루까지 다양한 식생 자료가 포함됐을 거예요. 환호 바닥 흙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을 시도했다면 마을의 성격을 규명할 만한 다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울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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