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심종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8월) 때 방간, 방원의 편에 섰다. 이때 정도전, 남은 등이 제거된다. 정종이 즉위했다. 정종 2년(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방간과 방원의 싸움이다. 시쳇말로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방간은 성질 급한 무인일 뿐 정략가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같이 자란 동생이 실권자가 되니 어깃장을 놓아본 것일 뿐이다. 싸움은 간단히 끝난다.
회안대군 방간은 여기저기 유배지를 옮기다가 결국 완산(전주)에 머무른다. 심종은 방간과 가까웠지만 ‘2차 왕자의 난’ 때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줄을 잘 선 것이다. 심종은, 태종 이방원에게 미움을 받지 않고 벼슬을 유지한다. 사건은 심종이 태종을 따라서 호남 지방으로 갔을 때 일어난다.
생강 선물 후 3년이 지났다. 태종 16년(1416년) 11월에는 ‘청원군 심종을 교하(경기도 파주)에 안치(安置)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조선왕조실록). 설명이 뒤따른다. ‘임금이 생강 선물을 알고 물었으나, 심종이 숨기고 고하지 않았다. 임금이 곧 죄를 가하지 않았는데, 심종이 일찍이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거나 웃기를 태연자약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동안 심종에 대한 탄핵이 빗발친다. 탄핵 이유는 간단하다. 권력자 태종에 대한 아부다. 오죽하면 태종이 직접 나서서 “심종의 죄가 있다고 하나 죽을 만큼 큰 죄는 아니다. 유배를 보내기는 하나 목숨에 손을 대지 마라”고 특별히 지시한다.
심종은 자원안치(自願安置)된다. 자원안치는 유배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유배형 중에서는 비교적 가볍다. 심종은 유배생활 끝에 태종 18년 3월, 토산현(황해도)에서 병으로 죽는다.
생강 선물은 빌미일 뿐이다. 생강이 국왕의 매제를 유배 보낼 정도로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영조 시대 학자이자 관리였던 유수원(1694∼1755)의 ‘우서’에는 전주의 생강 상인 이야기가 나온다. 전주 생강은 유명했다. 심종은 전주 특산물 생강을 조금 받았을 뿐이다. 심종의 구체적인 죄는 사통(私通)이다. 심종은 ‘잠재적 쿠데타 가능 인물’인 방간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매개체가 생강이었을 뿐이다. 별일 아니지만 문제 삼으면 별일이 된다. 생강이 사통으로 연결되고 역모의 징조가 된 것이다.
강계(薑桂)는 생강과 계피다. 나이 든 이들이 보양제로 먹었다. 생강, 꿀, 귤껍질 등을 섞은 차도 등장한다. 젊은이들에게는 생강을 권하지 않았다. 어린 사람이 생강을 먹으면 몸의 진기가 마른다고 믿었다. 단종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다. 즉위년인 1452년 12월의 기록에는 단종에게 생강을 권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 ‘건강(乾薑)은 맛이 쓰고, 따뜻하며 열을 많이 낸다. 50세 이후의 기력이 쇠한 사람은 복용할 만하지만, 전하는 춘추가 장성해 가고 혈기도 성해져 가니 오히려 몸에 좋지 않다’는 내용이다. 10대 소년인 단종에게는 마른 생강이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뜻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