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논설위원
한국이 2009년 12월 미국 일본 프랑스를 제치고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공사를 따내자 일본은 ‘UAE 쇼크’에 빠졌다. 이듬해 3월 일본 출장 때 만난 현지 경제인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를 거론하며 “하토야마 총리는 추상적 비전밖에 없다”며 아쉬워했다.
韓日리더십의 역전
요즘 분위기는 딴판이다. 경제 회복과 안보 강화를 내걸고 2012년 12월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 총리는 네 번의 큰 선거에서 모두 압승했다. 일본 신문을 읽다 보면 ‘아베 1강(强)’이란 표현도 눈에 띈다. 10년 전 ‘바보 총리’ 소리까지 들었던 수모를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집권 자민당은 2018년 9월 만료되는 아베 총리의 총재 임기를 3년 연장하는 방안을 사실상 확정했다. 아베 정권이 2021년 9월까지 이어지면 총리 재임 기간은 1차 아베 내각 때를 포함해 3500일을 넘겨 10년에 육박한다. 현재 분위기라면 20세기 초 가쓰라 다로가 남긴 총리 최장기 재임 기록 2886일을 갈아 치울 가능성이 높다.
‘1강 총리’의 리더십 아래 무기력증에서 깨어나는 듯한 일본에서 눈을 돌려 우리 현실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하다. 안보와 경제가 동시에 누란의 위기에 빠졌지만 국가의 앞날에 도움이 되는 움직임은 찾기 어렵다. 게다가 지금은 ‘최순실 사태’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켰다.
나는 최순실 의혹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판단을 아직 유보한다. 봇물터지듯 쏟아진 언론 보도 중에는 오보나 과장도 적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공식 직책도, 전문적 식견도 없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의 비호나 방치하에 국정을 우습게 만든 것만은 확실하다. ‘식물 대통령’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도 없다.
시간이 흐르면 ‘박근혜 시대’도 최순실 파문도 끝나겠지만 나라가 걱정이다. 가뜩이나 우리 정치권과 정부 행태로는 경제 살리기와 국가 정체성 확립이 쉽지 않은데 대통령의 리더십과 권위마저 추락했다. 개혁은커녕 발등에 불이 떨어진 복합적 위기관리라도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다.
국운 쇠퇴 손놓을 순 없다
한국의 국운(國運)은 융성기와 정체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든 조짐이 뚜렷하다. 그래도 이대로 손놓고 몰락을 맞을 순 없다. ‘대통령 리스크’를 부른 최순실 파문의 전모를 있는 그대로 신속히 밝혀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후속 조치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럴 때일수록 공직사회는 총리와 경제부총리, 기업은 경영자가 중심을 잡고 할 일은 해야 한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누군가는 소를 키우고, 또 누군가는 밭을 매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