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흡 산업부 차장
신 전 의원을 포함한 전현직 서울시 공무원들은 이 전 실장의 합리적인 업무 스타일도 높게 평가한다. 우선 정책 결정 과정에서 독단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혔다. 직속 참모는 물론이고 일선에서 일하는 하위직 공무원 의견까지도 들은 다음 최종 결정을 내려 부작용을 최소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의견수렴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마냥 결정을 미루지도 않았다고 한다. 행정고시 합격 전 광화문우체국에서 9급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생생한 현장 목소리’와 ‘신속한 의사 결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한 이 전 실장 특유의 스타일이라는 얘기다.
공직사회에서 고건 전 국무총리와 함께 ‘행정의 달인’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이 전 실장이 최근 스타일을 크게 구겼다. ‘최순실 게이트’의 유탄을 맞고 취임 5개월 만에 대통령비서실장 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이 전 실장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최 씨와 관련된 의혹을 적극 부인했다가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면서 개인적으로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기도 했다. 특히 국정감사장에서 ‘최 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는 지적에 대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답변했다가 나중에 ‘허수아비 실장’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이 전 실장 퇴임 후 박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는 고위 관료가 적지 않다. 이 전 실장 같은 ‘롤모델’을 사실상 ‘투명인간’으로 만들면서까지 정부 조직을 무시한 대통령을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부 관료 사이에서는 “대통령과 정책 협의도 못하는 장관들은 월급을 반납해야 한다”는 자조 섞인 탄식도 나온다. 관료들에게 배신감을 안긴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 운운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아냥거림도 나온다.
대다수 관료는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발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의 부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내내 관료들을 중용하면서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이끌게 한 결과다.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관료들을 앞세워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딸인 박 대통령은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자신을 돕기 위해 24시간 대기하고 있던 쟁쟁한 관료나 보좌진을 제쳐두고 비선조직에 의존하면서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박 전 대통령이 살아 있다면 딸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