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나선 김정일이 투표용지를 받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때 지인이 “용한 점쟁이가 있다”며 나를 점쟁이에게 데려갔다. 40대 중반 여성 점쟁이의 말 중에 “먼 길 떠날 팔자야. 물 건너가면 크게 되겠어. 다 잘될 거야”라는 말이 확 들어왔다. 속으론 “내가 강 넘으려는 걸 어떻게 알았지” 하고 기겁했다. 점 본 값은 쌀 2kg가량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 과정에서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가 고문을 받을 때조차 “용한 점쟁이가 물 건너가 크게 될 팔자라고 했으니 여기서 죽을 팔자는 아닐 거야”라고 믿으며 의지를 가다듬었다. 쌀 2kg 값에 잘될 것이란 굳은 믿음을 가졌으니 결과적으로 손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 해의 운세를 점쳐보는 토정비결도 북한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남쪽에 처음 왔을 때 지하철 책 할인 코너에서 ‘토정비결’을 발견했다. 그때 북한에선 토정비결은 가보(家寶)였다. 필사본이라도 있으면 운세를 봐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 귀한 책이 단돈 만 원도 안 했다. 냉큼 샀는데 몇 년 지나고 보니 그 책이 어디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요즘 토정비결은 북에서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중국돈 300위안(약 5만 원·북한 돈 37만 원)인데, 이 돈이면 쌀 60kg 이상, 옥수수는 100kg 이상 살 수 있다. 요즘은 토정비결 대신 두께는 3분의 1 정도, 너비도 3cm 작은 운세 관련 책이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2013년경부턴 컴퓨터 있는 집 대다수가 한국에서 들어간 사주팔자 프로그램을 깔아 놓고 매일 운세를 보는데, 요즘 5.0 버전이 가장 최신이라며 널리 퍼지고 있다.
불확실성이 많아진 북한에선 요즘 그야말로 미신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당과 수령을 마음속에서 파버리고 그 대신 미신이든 귀신이든 아무튼 보이지 않는 존재를 채워 넣었다. 요즘엔 정월 대보름이면 북한 도시 주변에 있는 산과 강은 대부분 불바다가 된다. 촛불을 켜고 빙 둘러서서 소원을 빌고, 강물에 촛불과 돈을 넣은 종이배를 둥둥 띄운다. 몇 년 사이 생겨난 풍경인데 아무리 단속해도 소용이 없다. 간부들도 차를 타고 다리를 지나는 척하면서 돈을 강에 던져버린다고 한다.
북한은 종교와 미신이 혁명사상을 좀먹는 사회악의 온상이라며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지만 점집은 나날이 늘어난다. 하긴 간부들부터 미신에 매달리니 통제가 될 리 만무하다. 심지어 요샌 보위부 수사관들도 몰래 점집에 가서 범인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고 할 정도니.
이름이 좀 알려진 점쟁이들이 몰래 평양에 불려 다닌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한 탈북인은 “둘째 누나가 애기신을 업었다고 하면서 점을 봐주는데 형제가 다 한국에 왔는데 점쟁이 누나만 벌이가 좋아 한국에 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당 간부에게 굿과 부적을 해주고 500달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탈북민은 친한 점쟁이가 “중앙당 간부 집을 돌며 점을 봤는데 하나같이 팔자가 새까맣다. 그래도 돈 받았으니 좋은 말만 해주고 왔다”고 말했다고 했다.
김정은이 걸핏하면 숙청하니 중앙당 간부들이야말로 미래가 제일 불안할 집단일 것이다. 장령(장성) 전용 병원인 어은병원의 동의의학과(한의과)에선 ‘상문(喪門)’을 본다는 명목으로 팔자와 관상까지 공공연하게 봐준다고 한다. 팔자가 새까맣다는 중앙당 간부들이 지금도 살아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액살(厄煞)은 안 보이는 귀신이 아니라 김정은이다.
북한 권력자들도 미신을 잘 믿었다. 중요 대회가 소집되는 날짜를 보면 대개 손이 없는 날이다. 김정일의 경우는 숫자 3에 집착했는데 그가 대의원 선거 때 출마한 선거구는 333호나 666호처럼 3과 연관되는 번호였다. 김정은도 재작년 111호 선거구에 출마했는데 세 숫자를 합치면 3이 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