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부터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 안숙선 명창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단로 국립극장에서 만난 명창 안숙선 씨. 이곳 남산 자락에서 젊음을 바쳤다. 창극 별주부전의 토끼, 심청전의 심청, 춘향전의 춘향…. 무대 위에선 늘 주연이었지만 조명이 꺼지면 그는 홀로 싸웠다. ‘남산 귀신’으로 불릴 정도로 독하고 고독하게 소리길 위에서.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우리는 명창 안숙선(67·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을 알고 있다. 여덟 살 때 창을 시작했는데 그 소리로 기존 명창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나고 자란 곳도 전북 남원이니 그는 마치 춘향의 환생 같았다.
지난해 12월 31일 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연 ‘제야 판소리 안숙선의 적벽가-박봉술제’. 국립극장 제공
안 씨는 이 공연에서 작창을 맡았다. 4회분 정도는 직접 무대에도 올라 고혼(높고 외로운 혼) 역으로 소리를 들려줄 작정이다. “서양 이야기를 다룬 작창은 제게 처음이에요. 까다로운 부분도 있지만, 사람 사는 것이란 똑같더군요. 다 진 전쟁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강한 트로이 여성들에게서 춘향, 심청, 흥부가 보입니다.”
그는 “전쟁 장면이면 적벽가, 창자가 끊어지도록 슬픈 장면이면 춘향가의 이별 대목을 혼자 다시 불러보며 다잡았다”면서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쿠바의 심리는 월매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고 했다.
최근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안 씨에게도 낭보였다. 그는 “우리 판소리도 충분히 문학상감”이라면서 “판소리 다섯 마당의 길을 따라가면서 지금 이 시대의 삶 이야기를 우리 소리로 풀어내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올여름 ‘소리 병’(성대 이상)에 걸려 난생처음 한 달이나 소리를 쉬었다. “남편과 둘이 지리산 자락을 돌며 밤도 주우면서 요양했는데 쉬면 쉴수록 소리가 더 절실히 다가오더군요. 10년 전에는 소리로 힘자랑만 한 것 같아요. 요즘은 소리 하러 나가기 전에 되레 너무 떨려요. 관객분께 아무런 느낌도 못 주고 나올까 봐서요.”
쉼은 약이었다. 연말엔 스승인 향사 박귀희 선생을 기리는 행사를 6년째 이어간다. 곧 박귀희 선생 기념관을 기공하고, 향후 경상남도에 가야금 아카데미를 만들어 국악의 터전을 넓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서른 살 되던 1979년 남산 자락의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30년 이상 머물며 단장, 예술감독까지 지냈다. “종일 연습을 하다보면 봄이 돼 비가 오고 어쩌다 내다보면, 여름 가을 지나 눈이 펄펄 내리고는 했죠.” 경비원이 야간순찰을 돌다 귀신소리에 기겁했는데 그게 안 씨의 것이었다는 얘기는 이곳의 전설이다. “20대 때까지는 의미도 모른 채 판소리를 했어요. 창극을 시작하며 비로소 우리 음악에 눈을 떴죠. 전국적으로 창극단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어요. 다양한 무대를 개발해 후배들의 설 자리를 늘리는 것도 제 역할 중 하나겠지요.”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녹음해 남기는 것도 그의 과제다. “이 나이에 세 마당이나 남겨뒀으니 공부를 더 해야죠. 내년부터 심청가 수궁가 흥부가 녹음을 시작할 겁니다. 심청가부터 해야죠. 조금이라도 젊을 때, 가장 긴 것 먼저….”
●안숙선이 말하는 창극
“궁중악 민속악 연희 무용…. 다양한 요소들이 이야기의 형식 안에 녹아 있다. 이를테면 춘향전 끄트머리 궁중 장면에서는 궁중 연희와 음악 양식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총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 경극, 일본에 가부키가 있다면 창극이야말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종합무대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