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형 국제부 기자
서울에서 3년가량 근무한 한 아시아 신흥국의 외교관인 A 씨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관계,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야당의 향후 움직임 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통상적으로 외교관들은 주재국의 정치 상황이나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해선 가급적 말을 아낀다. 하지만 경제·통상 담당인 A 씨가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했는지 신기하다”며 “한국 정치는 경제만큼 경쟁력이 있지 않다. 단순 부패나 권력 남용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기자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현재 한국 상황에 대해 묻는 그의 표정과 말투엔 실망감과 당혹감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해 많은 신흥국이 부러워하는 ‘롤 모델’ 나라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진 것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글로벌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해외 미디어들의 보도에서도 요즘 한국이 단연 화제다. 자극적인 단어를 잘 안 쓰는 뉴욕타임스(NYT)는 최 씨를 ‘무당 점쟁이(shaman fortuneteller)’, 박 대통령의 ‘그림자 조언자(shadowy adviser)’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했다.
CNN 등 외신 방송은 “한국 대통령의 가장 친한 친구(closest friend)가 국정을 농단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고 국민들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고 연일 기사를 내보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설을 통해 “박 대통령은 서울의 스벵갈리에 대해 확실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스벵갈리는 다른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최면술사를 상징하는 말이다. 한국이 어쩌다가 유력 외신으로부터 샤머니즘에 빠진 대통령을 가진 나라란 평가를 받게 됐는지 부끄럽다.
대통령 측근이 권력을 남용하는 일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역량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비선에서 움직이는 측근이 권력을 남용하고, 대통령이 공식 라인을 제치고 비선에 의존해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은 흔치 않다. 한국처럼 오래전부터 정치와 경제 시스템이 갖춰진 나라에서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이세형 국제부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