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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명인열전]국화와 함께 한 외길… “한달간 열리는 함평 국화축제 만들고 싶어요”

입력 | 2016-11-07 03:00:00

<60> 고찬훈 농업지도사




고찬훈 씨가 ‘대한민국 국향대전’이 한창인 1일 대형 국화 조형물 앞에서 자신의 국화 분재 작품을 설명하고있다. 국향대전이 가을 명품 축제로 성장한 데에는 그의 지극한 국화사랑이 있었다. 박영철 기자skyblue@donga.com

 어린 시절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섬 소년이 있었다. 또래 아이들은 갯가에서 조개를 캐고 물고기를 잡고 놀았지만 소년은 들판과 화단이 놀이터였다. 들에 핀 야생화 꽃잎을 따다가 책갈피에 넣어두고 보는 게 너무나 좋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누구 하나 손대지 않는 식물도감을 찾아 읽는 아이도 그였다. 운동장 화단에 봉숭아, 맨드라미가 피면 씨를 받아다가 집 담벼락 아래에 심고 그만의 정원을 가꿨다. 내년 봄에 꽃이 필까. 어떤 색깔일까. 그렇게 간절히 봄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식구들이 먹을 배추나 무를 심을 것이지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며 꽃가지를 꺾어버리곤 했다.

 김 양식을 하는 아버지는 집안일을 거들지 않고 꽃에만 빠져 있는 아들을 못마땅해했다. 중학교 2학년 국어 수업 때였다. ‘나의 미래’를 발표하는 시간에 친구들이 대통령이나 과학자, 의사가 되겠다고 거창하게 말할 때 그는 ‘꽃 농사를 지으면서 과수원을 일구는 게 꿈’이라고 했다. 다들 비웃었지만 그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흙냄새가 좋았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농업계 고교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섬에 있는 인문계 고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제법 잘했던 그는 3남3녀 중 유일하게 대학 문턱을 밟았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꽃과 다시 만난 건 전남대 농대 원예학과 1학년 때인 1993년. 선배를 만나려고 우연히 찾은 국화동아리에서 아름다운 국화 분재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분재였다. 나중에 일본에서 재배한 국화 분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국내에선 그런 작품을 만들 만한 실력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오기가 생겼다. 그때 국내 최고 국화 전문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 국화와 함께한 외길


 전남 함평 하면 흔히 ‘나비축제’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비축제 못지않게 함평을 전국에 알린 축제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 국향대전’이다. 올해로 13회를 맞은 국향대전은 해마다 함평군 전체 인구(3만5000여 명)의 5배가 넘는 20만 명이 몰려 ‘가을 명품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축제에 필요한 100억 송이 국화를 자체 조달할 정도로 대량 생산체계까지 갖추고 있다. 특히 전국에서 유일하게 300여 종의 신품종 국화를 선보이고 광화문, 세종대왕상, 독립문, 거북선 등을 축소한 국화 모형을 전시할 정도로 규모나 내용이 알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향대전이 이처럼 성장하기까지 한 공무원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올해 공직생활 14년 차인 고찬훈 함평군 농업기술센터 농업지도사(44)이다.

 고 씨는 국화에 관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육종가다. 그에게 국화 재배 기술을 배운 제자가 전국에 3000명이 넘으니 그런 명성을 얻을 만하다. “대학시절 국화 분재 사진 한 장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국화에 푹 빠져 수업을 빼먹기가 다반사였고 ‘누가 국화를 재배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전국 어느 곳이라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배운 재배기술을 학교 실습장에서 혼자 실험하기를 3년.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국화 재배기술은 차곡차곡 쌓여 갔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2000년 지방 농촌지도직 공채시험에 합격해 2003년 함평군 농업기술센터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도 오직 국화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맡겨진 업무는 벼농사였다. 실망이 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전공이 국화’라며 국화축제를 열어 보자고 했다. ‘나비축제 하나면 됐지 무슨 국화축제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꿈을 접을 순 없었다. 휴일에도 농업기술센터로 출근해 새로운 국화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땀을 흘렸다.

 꽃이 큰 대국은 잎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비가 와도 색깔이 변하지 않는 품종을 만들었다. 국화는 물과 더위에 민감하기 때문에 이를 잘 조절하는 방법도 그때 알았다. 당시 기술센터소장은 그의 열의에 감동했던지 국화 재배 담당으로 보직을 바꿔 줬다. 2004년 국화축제 예산 2400만 원을 확보했다. 주위에서 ‘과연 될까’라는 의구심이 컸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10월 축제를 앞두고 4개월 동안 혼자 준비했습니다. 돈을 아끼려고 대학 때 만났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제품을 싸게 구입했어요. 그때 죽기 살기로 뛰어다녔던 것 같아요.”

○ 알짜배기 축제로 키운 국향대전

 8000여 송이의 국화로 연 축제는 12만 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대박이었다. 첫 축제가 성공하자 공모를 통해 축제 이름을 ‘대한민국 국화대전’으로 정했다. 예산도 계속 늘어 올해는 7억4000만 원으로 축제를 치렀다. 전국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개최하는 축제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국향대전은 원가 대비 수입이 높아 전국에서 가장 알찬 축제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7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7억2300만 원의 입장료 수입을 올려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고, 올해는 4000만 원의 흑자를 예상하고 있다.

 국향대전이 알짜배기 축제로 자리매김하기까지에는 고 씨의 공이 적지 않다. 그는 축제가 끝나자마자 다음 축제를 준비한다. 지난 축제의 미비점을 보완해 관람객 동선을 다시 짜고 어떤 국화 조형물을 세울까 고민한다. 2008년 2월 불의의 화재로 국보 1호 숭례문이 전소됐을 때 그해 10월 오색 국화로 숭례문을 복원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숭례문의 절반 크기인 가로 14m, 세로 3m, 높이 8m 규모의 조형물을 국화 3000송이로 장식해 호평을 받았다. 관람객이 광화문 국화 조형물을 지날 때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가 흘러나오도록 음향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다.

 국화 육종 최고 전문가라고 하지만 그에게도 넘어야 할 산이 있다. 그가 새로 개발한 국화 품종을 농가에 보급해 부농을 육성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화훼 중에서 특히 국화는 전문적인 재배 기술이 없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동안 12종의 국화 관련 서적을 펴내고 14년째 ‘국화마을’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재배 기술과 새로운 품종을 알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하나는 대한민국 국화 축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다. 전국에서 국화를 주제로 축제를 여는 곳은 50여 곳. 대부분 10월 말을 전후해 개막하는 축제는 길어야 보름을 넘지 못한다. 개화 시기를 앞당기기가 쉽지 않고 꽃이 만개하는 시기도 길지 않기 때문이다.

 “빨리 피면서 오래가는 국화를 개발해 한 달 정도 축제를 여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축제를 열고 가장 늦게 폐막하는 국화축제를 함평에서 볼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고 했는데 그는 국화로 ‘유쾌한 반란’을 꿈꾸고 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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