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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문명 꽃피운 송국리문화, 왜 사라졌나

입력 | 2016-11-09 03:00:00

제 40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국내 청동기시대 대표하는 문화… 기원전 4세기 무렵 갑자기 소멸
일본에 전파돼선 오랜 기간 지속
원형덧띠토기문화와의 갈등설… 두 문화 사이의 연관성 규명 필요




송국리형 토기는 마치 계란을 닮은 몸통에 바깥쪽으로 벌어진 아가리를 지녔다. 원형덧띠토기(아래 사진)는 둥근 단면의 덧띠를 말아서 아가리에 붙인 특징을 갖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두 토기 문화는 기원전 4세기 전후로 엇갈린 운명을 맞았다. 동아일보DB

 마치 마야문명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종적을 감춘 선사문화가 한반도에 있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중·후기를 대표하는 송국리문화는 이른바 원형덧띠토기(원형점토대토기·圓形粘土帶土器)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온 직후인 기원전 4세기 무렵 사라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송국리문화가 전파돼 오랜 기간 존속한 사실이 확인된다. 정작 송국리문화가 발현한 한반도에선 특정 시점을 경계로 맥이 끊겨버린 것이다. 문명이 쇠락해도 다음 세대에 일정한 자취를 남기는 게 일반적인 걸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4∼6일 한국고고학회가 서울 숭실대에서 개최한 제40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는 ‘송국리문화 미스터리’가 화두에 올랐다.

 이창희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한국 원사고고학의 기원론과 계통론’ 논문에서 “안정적이고 세력이 강했던 송국리문화가 어떻게 원형덧띠토기인들에게 주도권을 내줬는지가 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송국리문화가 사라지고 초기철기시대가 끝날 때까지 원형덧띠토기인들은 왜 대규모 취락을 형성하지 못하고 고지대에 살았으며 안정적인 벼농사를 영위하지 못했는지를 반드시 구명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쉽게 말해 원형덧띠토기문화보다 인구가 많고 문명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던 송국리문화가 왜 갑자기 소멸했는지에 대해 학자들이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다.

 1975년 충남 부여군 송국리 발굴조사에서 처음 존재가 드러난 송국리문화는 원형 주거지와 특유의 민무늬토기(송국리형 토기)를 핵심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다. 송국리형 주거지는 안쪽 중앙에 2개의 기둥구멍이 나 있는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데, 광주 송암동, 충남 서산시 휴암리, 전남 영암군 장천리 등 남부지방 일대에서 대거 발견됐다. 원형덧띠토기문화는 둥그런 단면의 덧띠를 아가리에 말아 붙인 토기를 사용하는 문화로 경기 남양주시 수석동, 대전 괴정동, 충남 아산시 남성리 등에서 발견됐다.

 학계 다수는 원형덧띠토기문화가 중국 랴오닝(遼寧)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곳 이주민들에 의해 한반도 남부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한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는 1990년대 발표한 논문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공을 계기로 랴오닝 지역 이주민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함에 따라 한반도에 원형덧띠토기가 출현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원형덧띠토기문화가 이미 한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송국리문화를 소멸시킨 것으로 본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다. 평지에 제법 큰 규모의 주거지를 지은 송국리문화와 달리, 방어에 유리한 구릉지대에 정착한 원형덧띠토기문화의 행태가 특히 눈길을 끈다. 이주민들이 평지에 있던 원주민과 동화되지 못하고 갈등을 벌인 게 아니냐는 얘기다. 그러나 최근 송국리식 주거지에서도 원형덧띠토기가 출토된 사례가 발견되고 있어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경우 원형덧띠토기가 평지에 있는 야요이문화 주거지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일본 열도로 이주한 원형덧띠토기인들은 점점 야요이문화에 동화, 흡수돼 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평지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릉지대에 점점이 모여 살던 한반도의 원형덧띠토기문화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창희 교수는 “대규모 취락을 형성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한 송국리문화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해 인구 감소 가능성이 논의되지만 여전히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