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경제부 차장
1년 뒤 펼쳐질 시계(視界) 제로의 정국을 예언이라도 한 것일까. 지난해 8월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는 본보 칼럼에서 이렇게 밝혔다. 5년마다 실패한 대통령을 낳는 국가 지배구조를 어떻게 뜯어고칠지는 고민하지 않고 어느 쪽이 이기는지에만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다는 비판이다. 당장 오늘자 신문에 실어도 유효한 지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병준 후보자 지명을 사실상 철회한 시점에 그의 정책 철학을 논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광화문광장에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시민들이 당장 “지금 그게 중요하냐”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이제 물러나게 됐으니 문제가 해결될까. ‘김병준 카드’는 그렇게 버려도 아까울 것 없는 패일까.
정부의 경제 정책을 수년간 취재하면서 김 후보자만큼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진지한 정책 담론을 펴는 전문가도 찾기 드물었다. 산업 구조조정의 나아갈 길을 찾을 때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해법이 필요할 때도, 국정교과서 논란이 빚어졌을 때도 그의 해법은 많은 시사점을 던졌다.
“거위의 깃털을 살짝 뽑는 것”이라는 실언으로 공제를 일부 줄이는 세법개정안이 원점에서 재검토됐을 때 그는 “같은 문제로 고통을 겪었던 사람으로 동병상련을 느낀다”면서도 “결연한 의지 없이 여론과 표심만 따를 재검토라면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비판했다. 실패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예측은 적중했다. 연말정산 대란을 잠재우겠다며 정부가 만든 세액공제 개편안은 근로소득자의 48%를 면세자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했다.
김 후보자와 함께 종합부동산세로 편 가르기에 나섰던 10년 전 정부·여당 관계자들이 ‘재벌·대기업 부자증세’에 골몰하지만 그는 “중산층과 그 이하도 부자들 못잖게 덜 낸다”며 한국 세금제도의 모순을 바로잡자고 지적했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에 ‘의료 민영화’란 딱지를 붙이려는 시도에는 “대안 없이 반대만 하면 문제가 풀리나”라며 “경쟁력이 떨어지는 부분은 정리하고 빈자리는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서비스 산업으로 대체하자”고 강조했다.
책임질 일이 없으니 무슨 말인들 못 하겠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인물 가운데 누가 국가 정책에 대해 이 정도 자신의 철학을 갖고 대안을 앞세운 토론을 할 수 있을까. 여야가 그렇게 중시하는 협의를 거쳐 모셔올 합리적인 총리 후보자가 저성장 장기화와 양극화로 빚어진 한국 사회의 난맥을 제대로 짚을 수나 있을까.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