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8일(현지 시간) 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공직 경험이 없는 ‘워싱턴 아웃사이더’가 출마 선언 1년여 만에 162년 전통의 보수정당 공화당의 후보가 되고, 마침내 대통령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승리 연설에서 그동안의 대립과 분열을 달래는 듯 “인종과 종교 배경 믿음을 초월해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통합을 강조했다. 충격에 빠진 동맹국들을 향해서도 “미국 이익을 우선으로 하겠지만 모든 국가를 공정하게 대할 것”이라고 손을 내밀었다.
이단아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국과 세계질서를 예고한다. 당초 미국 내 주류 언론과 여론조사기관들은 많게는 90%까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승리를 예상했다. 월가와 유착한 정치 귀족, 유능하되 정직하지 못한 엘리트라는 평가를 받아온 그는 국가기밀이 포함된 문건을 주고받은 ‘이메일 사건’으로 도덕성에도 상처를 받고 미국 240년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번 선거는 엘리트 기득권 계층의 제도권 정치세력과 세계화의 물결에서 소외된 대중을 대변하는 비제도권 아웃사이더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8년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내세운 구호가 ‘변화’였다면 이번 선거의 키워드는 ‘분노’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깨졌고 중산층은 무너졌다. 미국 유권자 75%가 ‘부유하고 힘 있는 계층으로부터 미국을 되찾을 지도자’를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 로이터와 입소스 여론조사 결과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공약을 내건 트럼프가 세계질서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그는 미국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반(反)이민, 신(新)고립주의, 보호무역을 주창했다. 국제교역은 물론이고 이민, 외교, 안보에 이르는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당장 국내 시장은 코스피가 2,000 선이 무너졌고 일본, 중국, 호주 등 아시아 태평양 증시도 폭락했다.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어 개별 국가들이 각자도생에 나설 경우 전 세계는 환율 전쟁, 보호무역 전쟁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이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미국 경제를 저해한 “깨진 약속의 대표적 사례”라며 재협상을 주장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미 FTA 재협상으로 양허정지가 이뤄질 경우 2017년 이후 5년간 수출 감소 269억 달러, 일자리 손실이 24만 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경찰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트럼프는 미중 관계, 중동 문제 등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8년간의 오바마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대외 정책을 펼칠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는 중국을 향해 “미국의 지식과 일자리를 훔쳐가는 강간국”이라고 막말을 쏟아내 미중 갈등이 높아질 가능성도 크다. 동북아가 격랑에 빠져들면서 한반도가 주 전선(戰線)이 된다면 긴밀한 한미공조를 기대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트럼프는 한국을 향해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를 누리면서 경제 발전을 구가한 ‘무임승차(Free Riding)국’이라 비난하며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핵무장까지 용인할 수 있다고 했다. 북한 김정은을 향해서는 “미친 인간(Maniac)”이라면서도 “대화할 수 있다”며 직접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김정은 역시 미국과 대화하며 핵에 대한 암묵적 동의 및 미래 핵을 담보로 대북제재 완화나 살라미형 보상 등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상 국면을 만들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 선거운동 기간의 트럼프 발언은 내부 지지층을 겨냥한 정치적 발언 성격이 강하다. 또 자신의 대외 정책을 현실화시키려면 의회와 군부, 외교 관료, 싱크탱크와 전문가 그룹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과정이 많다. 트럼프가 주는 교훈도 있다. 자국의 안보는 자국이 지킬 수 있도록 힘과 외교전략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