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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우 칼럼]최순실이 드러낸 국가 시스템의 치명성

입력 | 2016-11-10 03:00:00

제왕적 대통령 비서의 힘은 자질보다 군주의 신임에 좌우
대면보고 아닌 서면보고 통해 정책 결정하는 대인기피증으론 복잡다단한 문제해결 불가능
대통령의 비리 위법행위 연루 막아야할 靑 민정 책임 크다




천영우 객원논설위원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

 ‘최순실 게이트’의 광풍이 대한민국을 온통 집어삼킬 기세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배신감과 절망은 하늘을 찌른다. 일개 민간인 측근이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고 대통령을 국제적 조롱거리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세계 11위 경제대국의 국가 운영 시스템이 허술하고 취약하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하드웨어도 이를 제대로 운용할 소프트웨어가 부실하면 소용없고 최상의 소프트웨어도 바이러스를 퇴치할 백신과 보안 프로그램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최순실 게이트라는 악성 바이러스 한 방에 민주공화국의 운영 체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비분강개와 탄식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일어나게 됐는지 진단해 재발을 막아야 한다.

 먼저 대통령비서실의 구성과 운영의 문제점부터 짚어보자.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비서의 힘은 자질보다 대통령의 신임에 비례한다. 대통령이 수석보다 그 아래 비서관을 더 신임하면 비서실 기강과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월권과 하극상이 판치는 콩가루 집안으로 전락한다.

 최순실 도움 없이는 국정을 운영할 자신이 없다면, 맡길 업무에 합당한 직책을 부여해 당당하게 보좌토록 해야 한다. 비서실장이나 부속실장으로 기용하기에 경력이나 배경이 너무 창피하다는 이유로 그림자 비서실장으로 활용하는 것은 공식 비서실장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공조직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문고리 3인방’ 문제도 대통령의 신임과 직위 간의 괴리에서 나온 것이다. 환관에게 도승지나 대신이 할 일을 맡길 바에는 자질이 좀 모자라도 차라리 도승지나 대신으로 발탁하는 것이 낫다.

 이번 사태는 대통령직에 대한 위험 관리 시스템의 고장이 빚은 참사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직접 비리나 위법행위에 연루될 위험을 사전에 탐지하고 예방하는 것은 민정비서실의 핵심적 의무다. 국정 마비에 따른 혼란을 막고 대한민국의 품격과 대통령직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리스크 관리체제가 실패했다면, 비선 실세의 존재와 행태를 몰랐다는 변명으로 면책을 받을 수 없다.

 대통령이 가급적 많은 민간인으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는 것은 권장할 일이고 최순실을 가까이 했다는 것도 그 자체로는 탓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이들의 사사로운 이익 추구에 이용당하고 국정 농단을 방조했다는 데 있다. 최순실이 아무리 대통령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해도 그가 이를 악용해 국가와 대통령에게 끼칠 해악에 대해 민정비서실이 경계와 보고를 소홀히 했다면 명백한 직무유기다.

 대통령의 독특한 업무 스타일도 박근혜 정부 실패의 치명적 요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핵심 수석들의 대면보고조차 받지 않는다는 풍문이 사실로 확인된 것은 충격적이다. 대통령의 불통과 대인기피증이 이토록 심각하다면 아무리 유능한 장관과 수석을 기용해도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정책 결정 과정과 국가 운영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보좌관들과의 난상 토론 없이 서면보고만을 토대로 졸속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해관계의 복잡한 구조와 사안의 다양한 측면과 대안을 균형 있게 검토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충분한 지식을 근거로 결정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원활한 소통과 토론으로 형성된 집단지성이 늘 최선의 정책 결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류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수석이 대통령에게만 구두로 보고해야 할 극비 정보도 있다. 대통령 측근이 열람할 수도 있는 문서로 보고해야 한다면 대통령에게 제공될 민감 정보의 범위가 줄어들게 된다.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어도 이를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다. 대통령이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이를 활용할 내공이 모자라면 대책이 없다. 결국 대통령을 뽑는 국민의 안목 문제로 귀결된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현행 권력구조에도 문제가 있으나 책임총리제나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편은 개헌 없이도 가능하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의 대표를 총리로 지명하고 국회 인준을 받은 총리가 헌법에 보장된 각료임면 제청권을 행사하면 총리가 내치를 책임지는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로 운영할 수 있다.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정당의 대표를 대통령이 총리로 지명할 경우 국회가 인준을 거부하면 그만이다. 예산 편성과 정부 직제 및 정원 조정 권한을 총리실로 이관하고 대통령비서실 직제에서 총리의 책임에 속하는 분야를 폐지하는 것만으로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줄일 수 있다.

천영우 객원논설위원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