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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정치를 향한 분노… ‘앵그리 화이트’ 일 냈다

입력 | 2016-11-10 03:00:00

[막오른 트럼프 시대] <1>이변을 선택한 美 표심




 8일(현지 시간) 오전 11시, 대선 투표소가 설치된 미국 버지니아 주 비엔나 시의 한 초등학교.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인 앤서니 로버츠 씨는 투표를 마친 뒤 투표소 뒤로 갔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트럼프-펜스’ 푯말을 땅에 꽂았다. 기자가 “트럼프를 찍었느냐”고 물었더니 “나도 트럼프가 못마땅하다. 하지만 기존 질서, 기성 워싱턴 세력에 다시 미국을 맡긴다? 이건 더 악몽이다”라고만 말했다.

 예상을 뒤엎고 공직 경력이 전무한 ‘워싱턴 아웃사이더’ 부동산 재벌인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만큼 미국 사회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CNN이 이날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 대통령 선택 기준과 관련해 응답자의 38%가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이라고 밝혔다. 대통령 부인과 상원의원 국무장관 등 화려한 이력의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이 갖고 있는 ‘풍부한 경험’과 ‘판단력’은 각각 22%에 그쳤다.

 미국인들이 선택한 변화는 기성 워싱턴 정치 세력을 겨냥하고 있다. 민주·공화당 간의 정쟁이 일상화된 정치 시스템에 대한 염증이 정치 경력이 전무한 트럼프를 통해 분출됐다는 것이다. 대선 직전 연방수사국(FBI)의 클린턴 개인 e메일 추가 수사 결정도 “클린턴은 기성정치에 얽힌 사람”이란 인식을 확산시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선임고문을 지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CNN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기이한 이력에 가려 미국인들의 불만과 분노가 얼마나 큰지 못 봤다”고 고백했다.

 선거에서 폭발한 변화에 대한 열망은 미국이 그동안 추구해 온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까지 겨냥하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민주주의를 이끌어 왔지만 이젠 세계 질서 유지를 위해 더 이상 예외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2008년 세계를 강타한 월스트리트발(發) 금융 위기로 중산층이 무너졌고, 중국 인도 일본 한국 등과의 무역전쟁에서 종종 손해를 보는 미국이 앞으론 ‘세계 경영’보다는 ‘미국의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트럼프의 캐치프레이즈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바로 이런 미국인들의 요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미국인들, 구체적으로는 최대 인종인 백인들의 삶을 국가가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는 중동 등에서 벌어지는 글로벌 분쟁에 개입하면서 정부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실속을 차려야 한다는 ‘고립주의’를 외친 구호였다. 트럼프는 자신이 추방하겠다고 공언한 히스패닉 인구가 밀집한 경합주 플로리다에서 승리하고,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 ‘러스트 벨트’(중서부의 쇠락한 공업지대)에 사는 백인 노동자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뉴욕타임스, CNN 등 주류 언론들은 표심 깊숙이 스며든 변화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우리끼리 잘살자’는 것은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미국 사회의 또 다른 불문율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트럼프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고 선거에서 ‘침묵했던 다수(silent majority)’로서 트럼프를 백악관 주인으로 만들어냈다.

 이제 미국은 트럼프 전과 후로 나뉘게 될 것이다. 트럼프가 공언한 대로 미국만을 우선하는 보통 국가로 남을지, 변화된 환경에 맞춰 세계를 주도하게 될지 지구촌의 시선이 워싱턴으로 쏠리고 있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