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효림 문화부 기자
한 출판사 대표는 ‘고해성사’(?)에 가까운 답변을 보내왔다. 최근 3년간 출간한 자사 책을 모두 살펴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고 했다.
‘지난 3년간 제목 고민을 별로 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번 기회에 다시 신발 끈을 묶어야겠습니다.’
‘부정적인 것을 미국과 연결짓는 건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독자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원제(The Unwinding·풀림)를 음역해서 ‘언와인딩’이라고 했으면 호기심이라도 불러일으켰을 텐데요. 해외에서 대히트를 치고 상까지 받은 책을 제목 때문에 망쳤다는 자책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아비판’에까지 이른 이 장문의 이메일을 여러 번 읽었다.
또 다른 출판사 대표는 제목이 좋은 책만 5권을 답했다. 아쉬운 책을 한 권만 꼽아 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은 이랬다.
“다들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애쓰면서 책을 만드는데요. 그걸 너무 잘 알기에 마음이 아파서 아쉬운 책을 못 꼽겠어요. 이해해 주세요.”
출판인들이 책에 대해 말할 때의 눈빛과 표정은 자식에 대해 말하는 그것과 무척 닮았다. 책을 칭찬하면 자식이 큰 상이라도 받은 양 기뻐하고, 부족한 점을 조심스럽게 말하면 진지하게 듣는 한편 가슴 아파하는 게 전해져 온다.
비단 출판인만이 아니다. 연극, 뮤지컬, 무용 등 공연계를 취재하면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들에게 책, 공연은 자식 같았다. 어마어마하게 큰돈이 생기거나 천하의 명예를 거머쥐는 일이 아님에도 그들은 그저 좋아서 이 일을 한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혼신의 힘을 다해.
최순실 씨가 놀이터처럼 헤집고 다녔던 문화계는 그런 곳이다. 최 씨가 금융, 보건복지처럼 예산 규모가 큰 분야는 전문적이고 복잡해 건드리지 못했다는 말도 나온다(사실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만).
문화계가 돌아가는 방식은 정교하거나 난해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곳에 종사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정성을 기울이며 일하고 있다. 전국을 뒤흔들고 있는 이 소용돌이는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노력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문화계 종사자들은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