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목욕탕이나 책방, 중국집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환영이다. 그 앞에서 서성이는 순간 우리의 감각기관은 마비되고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환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현재의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추억의 단층을 경험하면서 화석처럼 남는 건 돌아갈 수 없다는 쓸쓸함이다.
옛 거리를 거닐 때 밀려드는 회한은 통증이 사라진 채 갈라지는 살에서 배어 나오는 피 같다. 무통으로 흐르는 피가 심장으로 역류하는 느낌은 시간을 거꾸로 가는 자에게 내려지는 일종의 경고다. 추억의 거리를 걷는다는 건 가슴에 푸른 멍이 들게 하는 마음의 중노동이 될 수도 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옛길을 닮았다. 양지바른 시골 외할머니댁의 꽃밭 같은 시집이 있는가 하면 생전 처음 이성 친구의 손을 잡고 보았던 영화관 같은 소설도 있다. 다시 걸어 볼 일 없을 것 같은 길들처럼 다시 읽을 일 없을 것 같은 책들이 시간가루 같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애송하던 사랑시도 그 빛이 바래가며 청춘의 혈기로 가슴을 꿰매듯 읽던 사상집도 그 탄력을 잃게 된다. 그런 것들이 통증을 유발한다. 가을엔 예전에 읽었던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꺼내 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를 다시 꺼내 본다. 외롭게 지내던 나이 많은 남자가 어느 날 침대를 사진으로, 책상을 양탄자로, 의자를 시계로 부르기로 결심한다. 들뜬 마음으로 새로운 사물의 이름을 외우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는 사람들이 쓰는 말을 잊어버리고 결국 다른 이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려고 길을 떠나는 남자, 웃기지 않는 광대 등 외로운 이들의 짧은 이야기들이 함께 담겨 있다.
홀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미 지나쳤던 그 길을 다시 걷는 듯 잃어버렸던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 본다. 새롭고 낯선 나를 마주하게 된다.
김창완 가수·탤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