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논설위원
저소득 백인=새로운 흑인
필자는 첫 TV토론이 끝난 뒤 천편일률적으로 ‘힐러리 완승’만 전한 한국 언론에 대해 ‘트럼프 지지율 상승’을 보도한 미국 언론도 있다는 칼럼(9월 30일자)을 썼다가 “트럼프 지지자냐”라는 따가운 눈총을 많이 받았다. 그만큼 우리는 트럼프를 싫어하고 힐러리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예측이 빗나가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자칭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열풍을 무시하다 반성문을 써냈던 주류 언론들과 여론조사업체들은 이번에도 “완전히 틀렸다”며 자책하고 있다.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들, 특히 대졸 미만 저소득 백인층의 민심을 몰랐다면서 말이다.
최고의 선거 전략가로 꼽히는 딕 모리스 말이다. “트럼프 현상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수백만 시민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은 다름 아닌 ‘세계화(글로벌리즘)’였다는 것을 트럼프가 정확히 대변한 데 따른 결과다.” 실제로 이번에 트럼프에게 몰표를 준 저학력·저소득 백인층은 이민자 유입과 유럽 통합에 반대한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지지 계층과 유사하다. 트럼프가 주창한 ‘미국판 신고립주의’는 개인 생각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는 도도한 세계사적 흐름의 반영인 것이다.
트럼프는 난데없이 등장한 후보가 아니다. 2000년부터 대선 출마를 궁리하며 16년 동안이나 정치적 야망을 숙성시켰다. 그런 내공이 16명에 이르던 쟁쟁한 공화당 후보를 물리친 힘이었다. 돈이 지배하는 미국 정치판에서 돈 안 드는 선거를 실천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힐러리가 월가에서 받은 후원금으로 TV 광고를 쏟아붓는 동안 트럼프는 소셜 미디어로 유권자와 직접 대화하며 혼자 전국을 누볐다.
그가 당선되면 국제 금융시장이 요동치리라던 예상도 빗나갔다. 당선 직후 내놓은 화합과 통합의 메시지를 담은 연설 때문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힐러리를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고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힐러리의 헌신과 노고를 칭찬했다. 한미동맹도 강화 발전시킬 것임을 분명히 했다.
안보 망하면 나라 망한다
그는 모든 문제를 ‘딜(협상)’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후보에서 대통령으로 협상 국면이 달라진 만큼 새로운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자국 안보는 자국 힘으로’라는 그의 메시지는 변할 것 같지 않다. 한미동맹은 지켜가되 핵무장을 포함해 미국 없이도 북을 압도할 수 있는 독자적 안보능력을 점검하고 추구해야 할 때이다. 국내 정치는 혼란이 와도 나라 자체는 안 망하지만 안보에 실패하면 나라가 망한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