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흥 논설위원
아들뻘 부시의 DJ 모욕
2001년 1월 25일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전화를 걸어 왔을 때 김 대통령은 대북 포용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시는 전화기 아랫부분을 손으로 가린 채 곁에 있던 찰스 프리처드 아시아 담당 보좌관에게 물었다. “이 친구 누구야?(Who is this guy?)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 프리처드가 회고록 등에서 밝힌 비화다.
더 큰 재앙은 3월 7일 워싱턴에서 열린 첫 정상회담이었다.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은 “나는 북한 지도자에게 의구심을 갖고 있다”며 깊은 불신을 드러냈고 김 대통령의 답변을 가로채기도 했다. 김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부른 것은 외교적 결례 논란을 촉발했다. 우리말로 ‘이 양반’ 정도의 표현을 부시가 의도적으로 한 것인지 말들이 많았다. 김 대통령은 후일 자서전에서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하나 매우 불쾌했다. … 평소에 나이를 따지지 않지만 그 말을 들으니 그가 아들뻘이란 생각도 들었다”고 술회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과의 통화에서 가까운 시일 내 방한을 요청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7일 발 빠르게 트럼프를 만나니 우리도 회동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찍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의 결과가 성공적일 수 있도록 치밀히 준비하는 것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 트럼프가 내밀 리스트에 관해 한국 입장을 납득시킬 정교한 논리를 먼저 강구해야 한다.
외교 참사 되풀이 말아야
트럼프 행정부의 새 외교안보 라인이 대북 정책을 한국과 협의하려면 현실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이 대북 제재와 압박의 동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트럼프 행정부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을 답습하거나 한국이 하자는 대로만 할 리도 없다. 16년 전 미국 정권 교체기에 한국 외교가 조급증으로 범한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충만한 트럼프에게 박 대통령이 신뢰하고 거래할 만한 파트너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박 대통령이 그럴 준비가 돼 있는지 모르겠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