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배추는 일본에서 개량된 품종이다. 조선시대 배추는 크기가 작고 봄동 같은 모양이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배추는 ‘백채’ ‘배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배추는 ‘숭(숭)’ ‘백숭(白숭)’ ‘백채(白菜)’ ‘숭채(숭菜)’ 등으로 표기했다. 민간에서는 ‘배초(拜草)’라고 불렀다. 다산 정약용은 “숭채는 방언으로 배초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의 와전임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른다”고 했다(다산시문집). ‘배초’는 뜻이 없는 이두식 표현이다.
다산 정약용은 황해도 해주에서 고시관을 지냈을 때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시를 남겼다. ‘서관(西關)의 시월이면 눈이 한 자씩이나 쌓이니/겹겹 휘장에 푹신한 담요로 손님을 잡아두고/갓 모양 따뜻한 냄비에 노루고기는 붉은데/가지런히 당겨놓은 냉면에 배추김치는 푸르다(숭菹碧)’고 했다. 서관은 대중국 통로인 황해도, 평안도 일대를 말한다. 이때의 배추는 우거지같이 시퍼렜다. 결구배추는 조선 말기 한반도에 전래된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배추 품종은 여러 차례 개량되었다. 이름만 같을 뿐, 오늘날의 배추와 조선시대 배추는 전혀 다르다.
조선 전기에도 중국산 배추씨앗은 인기가 있었다. 문신 서거정(1420∼1488)과 강희맹(1424∼1483)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강희맹이 중국 사신으로부터 열일곱 종류의 중국 채소 씨앗을 얻는다. 그중에 배추씨앗도 있었다. 강희맹이 나눠준 중국 채소(唐蔬·당소) 씨앗 일부를 받은 서거정이 시를 남겼다. ‘백발 되니 온몸에 각종 병이 실타래처럼 엉킬 터/채소 농사 배워 잘 해내면 만년의 기쁨일레라/열일곱 종류 채소가 눈앞에 가득하니/채소밭을 돌 때면 기뻐 미칠 것 같다네.’
한양 도성 밖 왕십리에는 배추밭이 널려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편찬)에는 ‘왕십리평(往十里坪)은 흥인문 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와 배추 등 채소를 심어 생활한다’고 했다. 배추는 환금작물이었다. 실학자 유수원(1694∼1755)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키우는 이들은 도성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채소를 판다. 시골 사람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각자 자기 본업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우서).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청파, 노원역은 토란이 잘되고, 동대문 밖 왕십리는 무, 순무, 배추 따위를 심는다’고 했다.
홍만선(1643∼1715)은 ‘산림경제’에서 배추 기르는 법을 상세히 정리했다. ‘3월에 비옥한 땅을 골라 이랑과 두둑을 친 후 듬성듬성 종자를 뿌린다. 40일이 되면 먹는다. 9, 10월에 심어도 된다’고 했다. 교산 허균(1569∼1618)은 ‘한정록’에서 ‘7, 8월에 심었다가 9월에 이랑을 내고 나눠 심는다’고 했다. 한겨울만 아니면 배추는 늘 재배할 수 있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