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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암 극복 주인공 ‘국노’ 정현욱 은퇴한다

입력 | 2016-11-18 05:30:00

‘불굴의 사나이’ 정현욱이 마운드를 떠난다. 1996년 데뷔 후 무려 21년간 KBO리그를 대표하는 우완불펜으로 자리매김했던 정현욱은 ‘국민노예’와 ‘암 극복’이라는 수식어를 뒤로한 채 이제 인생 2막을 맞이하게 됐다. 스포츠동아DB


“이제 유니폼을 벗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국노(국민노예)’ 정현욱(38·LG)이 공을 내려놓는다. 암을 극복하고 올 시즌 마운드에 다시 서서 팬들에게 진한 감동과 희망을 전해줬던 ‘국노’는 파란만장했던 21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시즌 후 은퇴와 현역연장의 두 갈래 길에 서서 고민하다 최근 은퇴 결심을 굳힌 뒤 구단을 찾아가 유니폼을 벗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정현욱은 “구단에서는 ‘선수생활 더 해도 되는 것 아니냐. 서운하다’면서 만류하기도 했지만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제 열심히 할 자신이 없다. 나로선 한번이라도 다시 1군 마운드에 서 보는 게 목표였는데, 올해 그것을 이뤘다. 은퇴를 결심하기까지는 힘들었는데, 한번 결심하고 나니 이제 미련이 없다”며 심정을 전했다.

정현욱은 ‘대기만성(大器晩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사자성어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1996년 동대문상고(현 청원고)를 졸업하면서 2차지명 3라운드(전체 21순위)에 삼성 유니폼을 입은 그는 한동안 ‘만년 유망주’에 머물렀다. 건장한 체격과 타고난 힘을 바탕으로 공은 빨랐지만 다소 거칠었다. 2년간 2군 생활을 하다 1998년 1군 무대에 데뷔했고, 2000년대 들어 서서히 마운드에서 역할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전성기는 2000년대 후반부터였다. 특히 2008년 53경기에 마당쇠처럼 등판해 생애 처음으로 10승(4패)과 함께 11홀드까지 기록하면서 삼성 불펜의 핵으로 자리 잡았다.

2009 WBC 당시 정현욱.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2009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는 그를 전국구 스타로 올려준 무대였다. 대표팀에 발탁될 때만 해도 정현욱을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았지만, 그는 팀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구원등판해 다른 나라의 내로라하는 슈퍼스타들을 상대로 거침없는 투구를 펼쳐 팬들을 열광시켰다. 한국의 준우승에 밀알이 된 그의 별명도 ‘마당쇠’에서 ‘국민노예(국노)’로 승격됐다.

그는 2012년 말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얻어 4년간 옵션 포함 최대 28억6000만원에 계약하면서 LG로 이적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운드에 올라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국노’. 그에게 비로소 인생역전의 시간이 펼쳐지는 듯했다. LG 이적 첫해인 2013년만 해도 54경기에 등판해 2승5패·2세이브·16홀드, 방어율 3.78을 기록하면서 LG가 오랜 암흑기를 지우고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고생 끝에 빛을 봤던 그에게 다시 어둠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2014시즌부터 병마와 싸워야했다. 팔꿈치 통증이 발생하면서 시즌 중반 이후 마운드를 떠나 팔꿈치 뼛조각 제거수술을 했고, 그해 말엔 위암 판정을 받고 위를 모두 잘라내는 대수술을 했다. 위를 ‘전(全)절제’한 탓에 영양흡수력이 떨어져 살이 빠지고 힘이 달렸다. 운동선수에겐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1군 마운드에 다시 한번 오르겠다는 집념으로 암과 싸움을 벌여나갔다. 암을 이겨낸 뒤에는 몸을 만들고 힘을 길렀다. 마침내 올해 3월26일 시범경기 잠실 두산전에서 1군 마운드에 다시 서서 팬들 앞에 인사를 했다. 몸과 얼굴은 야위었지만 그가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알게 된 팬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26일 잠실야구장에서 2016시즌 프로야구 시범경기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가 열렸다. 6회초 LG 정현욱이 627일 만에 등판해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잠실 | 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그리고 2군에 다시 내려가 구위를 끌어올린 그는 4월 15일 1군으로 콜업돼 대전 한화전에 정규시즌 첫 등판을 했다. 여기서 같은 위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한화 정현석과 투타 맞대결을 펼쳐 암투병 환자와 팬들에게 ‘세상에 못할 것은 없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그는 올 시즌 17경기(21이닝)에 등판해 1승무패·1세이브·3홀드, 방어율 7.29를 기록했다. 8월17일 잠실 SK전이 1군 무대 마지막 등판이었다. 프로통산 518경기에 등판해 51승44패·24세이브·89홀드, 방어율 3.80을 기록했다.

은퇴를 결정하기까지 그인들 왜 고민이 없었을까. 1군 마운드에 다시 한번 더 서보려고 암과 사투를 벌이며 흘린 지난날의 땀과 눈물이 그인들 왜 아깝지 않았을까. 정현욱은 “올 초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시즌을 시작했다. 시즌 중반에 볼이 좋아지면서 솔직히 속으로 ‘더 해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소문난 성실성에다 숱한 수술과 재활과정 등을 겪었던 그를 두고 야구계는 일찌감치 지도자감으로 평가했다. 향후 진로에 대해 정현욱은 “당분간 쉬면서 차차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떠날 때를 알고 돌아선 자의 뒷모습. 굴곡지고 파란만장했던 ‘국노’의 야구인생은 일단 여기서 1막을 내린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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