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인의 미식견문록
드디어 ‘미쉐린 가이드 서울’이 발간됐다. 괄목할 부분은 24곳 중 절반 이상의 별이 ‘한식’ 카테고리에 뿌려졌다는 점이다. 전
세계 2700여 개의 ‘별’을 받은 레스토랑 대열에 10여 개 한식 레스토랑이 이름을 올렸다. 보석처럼 발굴되지 않은 레스토랑들이
내년이면 더 많이 발굴될 것이다. 해외 평가원들의 한식에 대한 이해수준 또한 높아지고 섬세해질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골목마다 전통과 현대를 잇고, 한식과 양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지역과 자연의 맛을 찾아가는 셰프와 레스토랑의 노력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올 9월 27일부터 5일 간 서울에서는 ‘한식’이 주인공인 음식 축제 ‘월드 한식
페스티벌’이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재단에 의해 열렸다. 요리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셰프들 스스로 아직 갈 길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하는
요리 ‘한식’. 그 가능성의 현장을 페스티벌에서 발견했다.
특히 국내 최대 규모 한식 레스토랑 위크인 ‘코리아
고메’가 진행돼 주목을 받았다. 서울시내 한식 레스토랑 50곳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저마다의 개성을 담은 ‘코리아 고메 메뉴’를
5일 동안 선보였다. 평소 판매 메뉴를 그대로 올리지 않고 한국적인 ‘발효’를 적극 활용해 제안하는 것이 미션이었다. 한식의
새로운 매력을 어필하며 눈길을 사로잡은 요리 10선을 들여다봤다.
이번에 미쉐린 2스타를 받은 레스토랑 ‘권숙수’의 권우중 셰프는 직접 담근 장과 초를 요리에 활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코리아 고메에서도 직접 담근 장과 초는 물론이고 장아찌, 젓갈, 특주 등 발효식품으로 맛을 낸 점심상과 저녁상을 선보였다. 특히 ‘멍게젓갈 양념의 붕장어구이’는 청정 바다인 통영에서 잡은 붕장어를 숯불에 구운 뒤 봄에 직접 담근 멍게젓갈을 곁들인 요리다.
셰프는 “장, 청주, 젓갈, 장아찌를 비롯해 한국의 발효가 이 한 그릇에 오롯이 담겨 있다”라고 말한다. 멍게젓갈은 직접 담근 조선간장과 고추씨 등으로 맛을 냈다. 약간 기름지면서 고소한 붕장어와 바다의 풍미가 그윽한 멍게젓갈이 맛과 향에서 조화를 이룬다면, 곁들인 국내산 연어알과 직접 담근 속초산 가시리장아찌는 감칠맛과 치감의 즐거움을 더했다. 여기에 최고급 도정미로 빚어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움이 특징인 ‘초특선 경주 법주’ 한 모금이면 입안이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아키라 백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름을 알린 백승욱 셰프가 올해 서울에 ‘도사’를 오픈했다. 페스티벌에서 셰프는 시그너처 요리인 튜나 버섯 피자로 시작해 청국장 가루로 맛을 낸 숙성회, 이베리코 보쌈으로 구성된 런치코스와 여기에 막걸리 폼을 올린 팝콘 제주 옥돔, 시나몬 간장과 진저 폼을 곁들인 풍천 장어밥 등을 더한 디너코스를 각각 선보였다.
‘도사’의 백승욱 셰프가 내놓은 이베리코 보쌈과 간장 달걀.
이 중 ‘이베리코 보쌈’은 돼지고기 중에서도 소량만 얻을 수 있는 살치살과 배추 대신 엔다이브를 사용해 재미있게 응용했다. 엔다이브는 김치 양념을 발라 김치찜처럼 조리했다. 보쌈은 테이블에서 직접 요리를 내면서 사과나무를 태워 스모크 향을 입힌다. 또 하나의 관심을 받은 요리 ‘간장 달걀’은 다름 아닌 디저트다. 설탕으로 만든 달걀 껍질을 깨면 튀밥 옷을 입은 아이스크림이 모습을 드러내고, 아이스크림은 수정과와 간장으로 맛을 냈다. 보쌈과 디저트 모두 담음새만 보면 한식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입안에 전해지는 향미는 분명 한식이다.
지난해 말 오픈하고 올해 단숨에 미쉐린 2스타를 받은 ‘곳간’은 반가의 전통 식문화 기반에 한식 요리연구가 이종국 선생의 ‘코리안 아트 퀴진’을 추구해가는 곳이다. 이번에 각종 장류와 장아찌 등으로 맛을 낸 화적코스 요리를 선보였는데 한국적 발효라는 테마 아래 직접 담근 효소와 장, 젓갈, 장아찌로 맛을 낸 ‘8가지 전식’으로 식탁을 열었다.
천도복숭아초, 자연송이구이, 산부추장아찌와 두부소박이, 특제간장을 곁들인 버섯묵, 씨겨자와 유자로 만든 소스와 메밀버섯닭고기만두, 된장연어말이, 석이버섯을 올린 버섯구운밥과 더덕장아찌, 꿩엿 소스로 맛을 낸 꿩강정과 풋귤청 차 등을 한 트레이에 담았는데 이를 순서대로 먹는다.
겉보기는 서양 요리 같지만 한국적 발효에 기반을 둔 ‘스와니예’의 요리.
한식이냐 한식이 아니냐는 논란을 자주 불러일으키는 ‘스와니예’는 이준 오너 셰프가 한국이라는 뼈대에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의 음식 스타일을 접목시켜 이른바 ‘서울 퀴진’이라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곳이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창의적인 요리를 선보였다. 담음새는 하나같이 서양요리 같지만 실상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적 발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셰프는 “엿기름 발효, 당 발효, 콩 발효, 식초 발효, 누룩 발효 등 코스마다 다른 발효 음식을 하나씩 녹여냈다”고 말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호응이 좋았던 요리는 ‘청국장 라자냐’다. 흑미 파우더로 만든 도우와 청국장, 쌈 케일, 버섯을 섞어 만든 필링을 라자냐처럼 번갈아가며 층층이 쌓아 올려 하루 정도 굳힌 다음, 팬 프라이한 요리다.
코스 요리로 나오는 ‘비채나’의 우엉콩즙깨묵과 화요로 만든 아이스크림.
한식 비스트로 ‘비채나’의 메뉴도 흥비롭다. 콩즙과 깨로 만든 ‘우엉콩즙깨묵’으로 시작해 화요X.P로 만든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하는 코스요리를 내놓았다. 방기수 셰프는 “한식에서 발효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식자재의 맛과 풍미를 끌어올리는데 ‘간’ 역할을 하도록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우엉콩즙깨묵은 고운 천으로 내린 깻물로 8∼10시간에 걸쳐 만든 크리미한 질감의 깨묵, 우엉과 파주 장단콩을 삶고 갈아 만든 고소한 즙의 질감이 입맛을 북돋운다. 디저트인 아이스크림은 가을 잣을 갈아 두유와 배합해 만들었다. 유지를 전혀 넣지 않고 곡물의 담백한 맛을 강조했는데, 여기에 화요 X.P로 만든 시럽이 디저트의 필수 요소인 단맛을 책임진다.
‘주옥’의 강원도 막장을 이용한 꽃게 콩소메, 꽃게 살과 전어와 성게로 속을 채운 두부.
직접 천연발효 식초를 담그는 신창호 셰프가 올해 오픈한 ‘주옥’은 이름처럼 주옥 같은 요리로 한식계에 새로 떠오른 신흥강자다. 런치코스 외에도 저녁시간에는 3개의 단품 메뉴로 참가했는데 ‘강원도 막장을 이용한 꽃게 콩소메, 꽃게살로 속을 채운 전어와 성게두부’가 그중 하나다. 진한 꽃게 육수에 강원도 막장으로 맛을 낸 콩소메가 핵심적인 맛을 낸다. 셰프는 “강원도 막장은 아주 소량으로도 깊은 감칠맛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기름지게 구워낸 가을 전어와 표고버섯, 양파를 넣고 직접 만든 수제 두부를 올리는데 각각 게살과 성게알로 속을 채워 다채로운 풍미를 발산한다.
‘아미월’의 유종하 세프도 “명인들이 만드는 좋은 장을 셰프들도 많이 사용하면 좋겠다”며 궁중어육된장을 사용한 랑고스틴 비스크, 궁중어간장을 사용한 갈비찜 등을 코스 요리 중 선보였다. 갈비찜은 궁중어간장과 진간장, 말린 생강으로 만든 양념장에 재운 소갈비 요리다. 한 번 쪄낸 후 그릴에서 구워 일종의 건조 과정을 거친다. 이때 맛이 한층 응집된다. 테이블에서 한 번 더 플랑베(프렌치에서 브랜디를 사용해 요리에 불을 붙이는 것)를 한다. 유 셰프는 전통 증류주 문배술을 사용한다. 랑고스틴 비스크는 프렌치 요리인 비스크와 궁중 어육된장이 만난 요리다. 랑고스틴과 어육된장을 함께 볶은 후 곱게 갈아 크리미한 질감의 수프로 완성했다. 이때 곱게 간 콩을 배합해 염도가 강하지 않도록 했다.
궁중음식에서 착안해 만든 ‘수퍼판’의 삼겹살찜.
솜씨 좋은 요리선생님으로도 잘 알려진 우정욱 셰프의 한식 레스토랑 ‘수퍼판’은 들깨소스 묵은지 냉채, 홍메기살회 무침, 매실청 소스의 삼겹살찜 등 발효의 맛을 뽐내는 한식을 선보였다. 이 중 삼겹살찜은 코리아 고메 단품 메뉴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요리로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던 궁중 음식 ‘연저육찜’에서 착안한 메뉴다. 우 셰프는 매해 유기농 매실을 직접 공수해 매실청을 담그고 일 년 이상 발효·숙성의 시간을 거친 뒤 요리에 사용한다. “11년 이상 발효시킨 매실청은 매실 고유의 향긋함을 요리에 더한다. 매실청에 제철 과일을 더해 소스로 사용하면 식재료를 보다 부드럽게 해준다”는 셰프는 스팀 오븐에 1차 조리한 통삼겹살을 팬에 구운 뒤 사과, 배, 파인애플을 갈아 넣은 매실청 소스로 촉촉하게 조려냈다.
현대판 주점을 추구하는 ‘한국술집 안씨막걸리’는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강된장 비빔밥’을 내놓았다. 심광석 세프는 “한국적 발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장이다. 그중에서도 된장을 가지고 옛 문헌에서 발견한 강된장찌개 비빔밥을 재현했다”고 밝혔다. 고봉밥 위에 반찬과 함께 강된장찌개를 올려 비벼 먹던 전통 강된장 비빔밥에서 착안했다는 21세기형 비빔밥은 직접 담근 햇된장에 애호박과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강된장찌개와 갓 도정한 쌀로 지은 밥을 한데 섞어 비빔밥 베이스를 만든다. 여기에 무생채, 백김치, 방풍나물을 올리고 사이폰으로 크림처럼 만든 순두부로 짠맛을 중화했다. 마지막으로 염장한 노른자 치즈를 갈아 올려 고소한 맛을 더하고, 튀긴 메밀을 올려 톡톡 씹히는 식감을 더했다.
술지게미로 고기를 재워 만든 ‘얼쑤’의 수육.
직접 전통주를 빚는 캐주얼 한식당 ‘얼쑤’에서는 보통 버려지는 술지게미를 고기 재우는 데 활용했다. 조성주 셰프는 “수급이 어렵고 관리가 까다롭지만 술지게미로 고기를 재우면 가양주 특유의 꽃향기가 배어 있는 특별한 보쌈으로 완성시켜준다”고 설명한다. 수육의 수분 함유량을 고려해 쌈장은 갈치속젓과 잡어젓갈로 되직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강원 인제에서 나온 명이나물로 만든 장아찌, 제철을 맞아 단맛이 깃든 파김치까지 곁들이면 감칠맛 나는 보쌈 요리 한 접시가 완성된다. 이름하여 ‘술지게미에 재운 목살 보쌈, 갈치속젓쌈장, 명이나물’이다.
박홍인 바앤다이닝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