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완아, 미안해]미제수사팀의 하루
“여기는 전남 여수입니다. 망자와 접신할 수 있습니다. 이곳으로 오세요.”
전화를 받은 남설민 형사(35)는 동료 2명과 함께 여수로 달려갔다. 통화 속 ‘망자’는 2010년 목포에서 살해당한 조모 씨(당시 30세). 당시 간호학과 여대생이었다. 2013년 2월 전남지방경찰청 미제수사팀으로 발령이 난 남 형사는 조 씨 살해범을 붙잡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찾을 각오로 일하고 있었다. 여수시 돌산읍에서 40대 무속인을 만났다. 그는 초와 향을 피운 뒤 종을 흔들고 징을 두드렸다.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으라고 했다. “범인이 누구인 것 같나” “살해 장소가 어디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말은 허무했다. 무속인은 “이미 죽은 것 같다” 등 횡설수설을 이어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참 ‘밀당’을 벌였지만 형사들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시그널’ 잡기 위해 어디든 간다
2010년 10월 15일 밤 조 씨는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변을 당했다. 평소에는 버스를 이용했다. 그러나 이날은 울적한 일이 있어 걸어서 집에 가고 있었다. 도보로는 30분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그는 집에 가면서 “곧 도착한다”고 가족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이날 밤 조 씨는 가족 품으로 가지 못했다. 조 씨의 언니와 남동생이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끝내 조 씨를 찾지 못했다. 그 대신 다음 날 새벽 실종된 장소 인근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두 가지 흔적을 갖고 범인을 쫓았다. 조 씨의 비명이 들린 곳에 주차된 차량을 봤다는 목격담과 조 씨 몸에 남은 용의자의 유전자(DNA)였다. 목포 시내 폐쇄회로(CC)TV를 샅샅이 살피고 목격된 차량과 비슷한 4000여 대 차주의 알리바이를 일일이 확인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의심 가는 사람 2000여 명의 DNA를 채취해 용의자의 것과 대조했지만 일치하지 않았다. 남 형사는 지금도 매일같이 사건 현장 주변을 탐문하며 범인이 남긴 ‘시그널’을 쫓는다. 그는 “사건 현장을 직접 걸어 보며 그날의 일을 재구성하고 흔적을 찾는다”며 “최근에는 사건 발생 직후 인근 지역 공단에서 일을 갑자기 관둔 사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한때 목포를 술렁이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결정적인 단서가 될 제보도 끊긴 지 오래다. 조 씨의 언니는 “형사님이 정말 열심히 하는데 결과물이 없으니 형사님도 우리도 정말 답답하다”며 “그래도 우리에게는 믿을 사람이 형사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 형사는 “범인을 붙잡아 유족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다”며 “믿고 기다려 주는 유족에게 죄스러운 마음뿐”이라고 했다.
10년 만에 범죄 피해자 얼굴 복원
부산지방경찰청은 임시 매장됐던 피해자의 유골을 바탕으로 전문가에게 얼굴 복원을 요청했다. 서울성모병원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전문가들이 3차원(3D) 이미지 스캐닝 기법 등을 활용해 변사자의 얼굴을 복원했다. 변사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제보자 모집에 나섰더니 60여 건의 제보가 들어왔다. “군대 선임과 닮았다” “부산 어디에 산 거 같다” 등 사소한 제보도 일일이 찾아가 확인하고 있다.
범인을 붙잡아 달라고 애원하는 유족도 없지만 경찰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정석완 팀장(56)은 “억울하게 죽은 변사자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다”며 “지금까지 가출, 실종 신고가 없는 것을 보면 가족과 유대가 없는 외로운 사람 같다”고 말했다.
보이지도 않는 미세증거로 범인 추적
2008년 여름 경북 포항에서는 토막 난 시신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공포에 휩싸였다. 그해 7월 8일 포항시 북구 흥해읍 도로변 갈대숲에서 심하게 부패한 다리, 양팔 등 시신의 일부가 발견됐다. 같은 달 22일 이곳에서 1.2km 떨어진 도로변에서 머리와 몸통 부분이 추가로 발견됐다. 범인이 토막 낸 시신을 동해안 도로를 따라가면서 버린 것처럼 보였다. 6월 12일 실종된 뒤 소식이 끊긴 주부 현모 씨(당시 49세)의 시신이었다.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북지방경찰청은 13년 전 뺑소니 사고의 진실이 치밀하게 계획된 청부살인 사건임을 밝혀냈다. 미궁에 빠졌던 사건은 공범이 술을 마신 상태에서 지인에게 “청부살인 범죄를 한 사실이 괴로웠다”고 털어놓은 게 실마리가 됐다. 경찰은 재수사에 착수해 사망한 김모 씨(당시 54세)의 아내 박모 씨(65)와 박 씨의 여동생, 여동생의 애인 등이 사망 보험금을 노린 사실을 밝혀냈다.
강 팀장은 “13년이 흘러 살해 현장도 많이 바뀌었지만 폐기되지 않은 사망보험금 거래내용을 찾아내 피의자들의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며 “범죄자들에게 ‘언젠가 반드시 잡힌다’는 경고 메시지를 주는 효과를 봤다”고 밝혔다.
김동혁 hack@donga.com·박훈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