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흥 논설위원
노동신문은 10월 31일자 5면에 ‘특대형 정치추문 사건을 통해 드러난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실상을 토로한다’는 장문의 논평으로 최순실 게이트를 처음 대서특필했다. 6면 ‘청와대로 가자, 민중의 힘으로 박근혜를 징벌하자’는 기사엔 출처가 궁금한 1차 촛불집회 사진이 13장 실렸다. 이후 노동신문은 도저히 인용할 수 없는 저속한 표현으로 박 대통령을 연일 비방하고 우리 사회의 대정부 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북풍의 시대는 지나
노동신문에서 착잡함을 느끼는 것은 속내가 뻔한 북이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근거가 지금 국내에서 논란이 되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매체는 온갖 억측과 풍문, 괴담까지 마치 사실인 양 포장해 선전 선동에 열을 올리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남과 북에서 동시에 박 대통령 퇴진 얘기가 나오는 현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돌아보면 북이 노동당 창건기념일인 10월 10일 우려됐던 6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고, 11월 8일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승리하는 이변이 벌어지면서 한반도 풍향이 달라졌다. 한국 여론의 관심은 안보 위기에서 최순실 게이트로 옮아갔고, 미국은 정권 교체기에 접어들어 한미의 대북 압박은 탄력을 받기 어려워졌다. 설령 북이 도발했어도 ‘북풍’이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에겐 반전(反轉) 카드가 없다. 모든 국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거라던 개헌 카드는 뜻대로 먹히지 않았고, 과거처럼 안보 위기로 국내 실정을 가리는 것도 이젠 통하기 어렵다. 지금 도발하면 박 대통령을 도와주는 격이니 김정은도 한동안 트럼프 차기 미 대통령의 한반도 정책을 지켜보며 관망할 듯하다. 서해 등의 국지 도발 가능성도 있으나 박 대통령이 강력 응징에 나설 경우 그것이 정당해도 국면 전환을 노린 과잉 대응 논란이 일 공산이 크다. 북핵 사태가 여전히 엄중한데 안보가 정치의 늪에 빠졌다.
안보 위기 이용 안 된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