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900km 다녀와 책 낸 이혜민-정현우 부부
이혜민(왼쪽) 정현우 씨는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 전시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평생 기억에 남을 결혼식을 올렸다. 길 위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해준 순례자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그래픽디자인 회사 편집자였던 이 씨와 웹디자이너인 정 씨는 사표를 내고 길을 떠났다. 한 달에 하루 이틀밖에 쉬지 못하고 매일 밤 12시가 넘어 퇴근하는 삶에 지쳤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고비는 양가 부모님 설득하기. 의외로 ‘쿨하게’ 허락이 떨어졌다.
“데이트할 때는 제가 모든 걸 결정했는데 순례길에서는 현우 씨가 길을 척척 찾고 제 다리에 붕대도 감아주며 이끄는 거예요. 이렇게 듬직한 면이 있나 싶어 놀랐어요.” “혜민이가 발목과 무릎의 통증이 심한데도 끝까지 걸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작은 면사포를 쓴 이혜민 씨와 나비넥타이를 맨 정현우 씨. 이혜민 정현우 씨 제공
이들은 순례를 마친 후 1개월 반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여행했다. 3개월간 쓴 돈은 1200만 원으로, 예단과 신혼여행비까지 포함한 보통 결혼 비용의 5분의 1 수준이다. 귀국 후 이 씨는 1인 출판사 ‘900km’를 차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책을 냈다. 초판 700권 가운데 후원자 300명에게 보내고 난 나머지 책이 모두 팔려 2쇄로 1000권을 더 찍었다.
순례 뒤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게임회사에 취직한 정 씨는 “승진, 커리어 등을 고민하며 앞날을 불안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게 됐다”, 이 씨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며 살지 않기로 했다. 조금 벌더라도 재미난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합창하듯 당부했다. “두 사람의 의미 있는 행위만으로도 결혼이 성사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들의 표정은 햇살처럼 환했다. 순례길에서 등산복에 작은 면사포를 쓰고 넥타이를 맨 채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처럼.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