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그가 8·9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데는 ‘호남 출신 첫 대표’라는 상징성이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무(無)수저 신화’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자산이다. 당직 생활 31년간 17계단을 뛰어올라 미관말직에서 당의 간판이 됐다. 희망을 갖는 것 자체가 고문인 시대에 진짜 희망을 보여준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그런 이 대표가 박 대통령과의 의리에 사로잡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역대급 버티기 대표’란 조롱의 대상이 됐다. 한 줌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기득권의 상징이 됐다. 그가 꿈꾼 정치 혁명의 쓰나미(지진해일)에 자신이 가장 먼저 쓸려 내려갈 처지에 놓였다.
반면 이 대표의 의리는 정치적 자해(自害)행위다. 그가 호남에서 피땀으로 일군 보수의 싹은 이번 촛불에 잿더미가 될 공산이 크다. 이 대표의 의리는 TK 의원들과 분명 차원이 다르지만 그 진정성을 돌아봐주기엔 세상의 분노가 너무 크다. 세상은 이미 친박계의 맹종을 박 대통령 실패의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꼽는다. 또 ‘그들이 지키려는 건 박근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라고 수군거린다.
이 대표는 4·13 총선 직후 기자에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쓴 ‘세종처럼’이란 책을 추천했다. 이 책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태종의 왕위 승계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그간 밀려 있던 공사들을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한 말이다. ‘토목공사는 백성들이 심히 괴롭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내가 다 감당하겠다. 세자가 즉위한 다음엔 한 줌 흙이나 한 조각 나무의 공사라도 하지 않게 해 민심을 얻게 하겠다.’”
태종의 희생 위에 세종이 태평성대를 이뤘듯 보수층은 박정희의 희생 위에 박근혜가 ‘국민행복시대’를 열어주길 바랐다. 그렇게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박근혜에 대한 부채를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최순실 국정 농단의 뿌리가 박정희 집권기까지 뻗어 있으니 보수층은 할 말을 잃었다. 그저 탄식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보수층의 가장 큰 우려는 아마도 박근혜의 몰락으로 박정희마저 부정(否定)당하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사즉생의 각오로 일궈낸 근대화와 산업화의 보수 가치마저 부인되는 현실 말이다.
지금 야권은 이미 정권을 잡은 듯 큰소리를 치고 있다. 보수 정권의 공적을 모두 갈아엎을 태세다. 누가 이들의 오만에 제동을 걸 것인가.
그렇다면 이 대표가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전의를 상실한 보수층이 다시 나설 명분을 만들어줘야 했다. 새로운 보수가 움틀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줘야 했다. 비주류를 밀어내 보수가 분열한다면 정권만 잃는 게 아니다. 박 대통령 역시 비참한 말로를 예약해 놓는 것이다. 이 대표가 지키려는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는 보수 재탄생의 길로 가야 했다.
이 대표는 박 대통령 탄핵에 동참하는 걸 두고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에 비유했다. 하지만 베드로의 부인(否認)이 없었다면 기독교 2000년의 역사도 없었다. 그의 부인이 각성과 회심으로 이어지면서 기독교는 생명력을 얻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 대표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이 대표가 직접 박 대통령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저 보수층이 각성과 회심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도록 물꼬를 터주면 된다. 자신이 모든 걸 내려놓음으로써 친박계 2선 퇴진의 마중물 역할을 하면 족하다. 민심과 맞서 생존한 정치 세력은 없다. 삶 자체가 정치사인 이 대표가 누구보다 잘 아는 철칙이다. 이번 주가 보수 분열의 최대 고비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