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A.com

[특파원 칼럼/장원재]한국이 부럽다는 이유

입력 | 2016-11-28 03:00:00



장원재 도쿄 특파원

 일본에 있지만 최근 한국 소식은 원치 않아도 듣게 된다. 일본 신문이 매일 대서특필하고 방송에서도 실시간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선 주요 인물의 사진을 붙인 도표를 만들어 시시콜콜 설명하며 ‘세상에 이런 나라가 있느냐’는 식으로 몰아가는 때가 많아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조금씩 다른 얘기도 들린다. 지난주 모임에서 만난 일본 국립대 교수는 “한국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은근히 비꼬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촛불시위에 100만 명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상상이 안 간다. 일본 인구로 치면 200만 명 이상이 총리관저를 둘러싼 것인데 살아 있을 때 한 번은 보고 싶은 광경”이라며 감탄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지난해 8월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국민 과반수가 반대하는 안보법을 강행 처리할 때 국회 앞에 모인 시위대가 12만 명(경찰 추산 3만 명)이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반세기 만에 국회 앞을 점거했다”며 놀라워했다.

 모임에서 옆자리에 있던 30대 일본 여기자는 “태어난 후 한 번도 시위를 통해 뭔가 바뀐 적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해 대규모 시위에도 아베 정권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안보법을 통과시켰다. 동일본 대지진 이듬해인 2012년에는 20만 명이 모여 반(反)원전을 외쳤지만 원전 재가동을 막지 못했다. 원전 반대 시위는 지금도 매주 금요일 총리관저 앞에서 열리지만 수십 명이 모이는 게 고작이다. 이 기자는 “5년 동안의 시위에도 전혀 성과가 없었다”고 푸념했다.

 돌이켜보면 1960년 안보투쟁 때 사상 최대인 33만 명이 국회 앞에 모였음에도 미일 상호방위조약 개정 결정을 뒤엎지 못했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당시 총리가 사퇴했지만 그때 만든 조약은 지금도 그대로다. 한 일본 사립대 교수는 “일본은 ‘와(和·화합)를 강조하다 보니 불리하면 다른 의견을 내지 않고 승부가 나면 결정에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많이 모여도 결정된 사항을 뒤집기 힘든 사회 분위기라는 것이다. 그는 “이번 사태에서 한국의 다이너미즘(dynamism·역동성)을 다시 확인했다”고도 했다.

 한국은 거리에서 역사를 바꾼 경험이 여럿 있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 민주항쟁…. 가깝게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때도 촛불을 들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냈다.

 물론 거리로 나오기 전 제도권에서 문제를 해결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가 막무가내로 버티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어떤 의미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닐까.

 100만 명의 시위가 평화롭게 끝난 후에는 일본 언론의 분위기도 조금은 바뀌는 모습이다. 사건의 후진성은 지적하면서도 시위를 언급할 때면 “대단한 광경”이라고 한다.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 시위가 끝나고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인터넷에도 “굉장하다” “다시 봤다” “일본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대통령이 추락시킨 ‘국격(國格)’을 시민들이 힘을 합쳐 쌓아올리는 모습은 어떤 의미에선 슬프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위대가 끝까지 ‘비폭력’의 원칙을 꼭 지켰으면 한다. 정치권에서는 거리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하는 방안을 하루빨리 찾아야 한다. “시위에 나갔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푸념을 한국에서도 듣고 싶지는 않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