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성 경제부장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는 손이 떨려 제대로 메모조차 하지 못했다. 늦가을 저녁의 추위 탓도 있었겠지만 IMF의 무시무시한 요구를 한국이 견뎌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발표가 끝난 뒤 회견장을 빠져나올 때 속절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후 우려는 현실이 됐다. 수많은 기업이 쓰러졌고 근로자들이 내동댕이쳐졌다. 당시 최종 부도를 맞은 한 건설회사 K 과장과 밤새 통음하며 그의 눈물 반 콧물 반 섞인 신세 한탄을 들어주던 기억도 여전히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는 이후 몇 차례 회사를 옮기다 고향인 대구로 낙향했다. 그리고 반백수 생활을 한다는 말을 끝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K뿐이 아니었다. 당시 외환위기를 겪으며 170만 명이 직장을 잃었고, 중소기업 사장에서 노숙인으로 전락한 이들의 사연이 줄을 이었다.
경제 총수 자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당시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1997년 11월 14일 IMF에 지원을 요청한 뒤 19일 공식 발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19일 오전 경질됐고, 정부 계획은 갈지자걸음을 걸었다. 후임자 임창열 부총리가 IMF행(行)을 번복하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계획했던 자체 외화 조달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부는 이틀 뒤인 21일 IMF에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 같은 약속 번복으로 신뢰를 잃자 IMF는 한국에 가혹한 구제금융 조건을 요구했고, 정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정부는 이달 2일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임에 임종룡 금융위원장을 내정했다. 이후 한 달이 다 되도록 두 사람은 자리를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각종 경제 관련 중요 현안은 처리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가 ‘골든타임’으로 평가되는 산업 구조조정,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등장으로 격변이 예상되는 한미 간 경제 환경, 야당의 주도하에 산으로 갈지 모르는 내년 예산 및 세법 개정안 등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숙제들이다.
이 같은 한국의 위태로운 행보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8일 강력한 경고장을 보냈다. 한국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보다 0.4%포인트 낮춘 2.6%로 제시한 것이다. OECD는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경제에 미칠 단기적 위험이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거론될 정도로 나빠진 정치 상황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칠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같은 짓을 되풀이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착란’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식이라면 또다시 IMF에 굴욕적인 수모를 겪는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황재성 경제부장 jsonh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