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세종시 나성동 유적 발굴한 이홍종 고려대 교수
24일 세종시 나성동에서 이홍종 고려대 교수가 백제 도시유적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5세기 백제 도시의 기반이었던 금강이 보인다. 세종=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2010년 10월 초 충남 연기군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 발굴 현장. 밤새 내린 가을비로 유적이 물에 잠겼다는 보고를 듣고 부랴부랴 현장을 찾은 이홍종(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58)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제시대 도시 유적 한가운데 U자형의 거대한 호수가 주변 언덕 위 집터와 더불어 장관을 이뤘다. 비가 내리기 전에는 한낱 구덩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유구였다. 1.5m 깊이의 호수는 최대 너비 70m, 길이 300m에 이르렀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꼴이 마치 현재의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을 연상시켰다.
고지형 분석 결과 나성리 도시유적 내 토성을 둘러싼 옛 물길과 금강, 제천이 일종의 해자로 활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홍종 교수 제공
○ 도로, 빙고(氷庫) 등 도시 기반시설 즐비
나성리 유적은 백제의 지방 거점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경우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 등 여러 지방 도시가 발굴됐지만 우리나라는 발굴로 전모가 드러난 고대 도시유적이 별로 없다. 고고학자들이 지방도시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성-거점도시-농경취락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수도 이외 지역 귀족, 서민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성리 유적이 흥미를 끄는 건 넓은 부지에 도로망을 먼저 설치한 뒤 건물을 지은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도로 유구 안에서 건물터가 깔려 있거나 중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성리에서는 너비 2.5m(측구 제외)의 도로뿐만 아니라 귀족 저택, 토성, 고분, 중앙호수, 창고, 가마터, 빙고, 선착장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이 거대한 도시유적을 지은 주체가 백제 중앙정부인지 혹은 지방 유력층인지를 놓고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박순발(충남대 교수)은 나성리가 풍납토성의 구조와 흡사한 점을 들어 백제 중앙정부가 건설을 주도한 걸로 본다. 예를 들어 고지형(古地形) 분석 결과 풍납토성과 나성리 모두 토성 주변 수로와 옛 물길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판 흔적이 발견됐다.
나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백제 토기. 이홍종 교수 제공
○ 첨단 ‘고지형 분석’으로 도시유적 찾아내
사실 나성리 도시유적의 존재는 발굴 5년 전인 2005년 9월 고지형 분석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고지형 분석이란 항공사진과 고지도 등을 통해 유적 조성 당시 옛 지형을 추정해 지하에 묻힌 유적 양상을 파악하는 기법이다. 연사된 항공사진들의 낱장을 비교하면 겹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를 3차원(3D)으로 재연하면 세부 지형의 높낮이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랜 침식, 퇴적으로 사라진 옛 물길(구하도·舊河道)이나 구릉의 위치를 알아내 주거지 유적의 존재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홍종은 고지형 분석을 통해 나성리뿐만 아니라 공주, 논산, 청주에도 백제 도시유적이 묻혀 있을 걸로 예상한다.
재밌는 건 고지형 분석을 통해 규명한 옛 물길을 따라 지진이나 싱크홀이 빈발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물길은 암반층이 상대적으로 얇아 지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고베 지진 당시 사망자의 97%가 구하도와 습지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는 5세기에 건립된 나성리 도시유적이 약 100년가량 존속한 뒤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반 이후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쇠락의 원인으로는 고구려 남진과 자연재해 등이 거론된다. 이홍종은 “인근 곡창지대인 대평리 유적에서 강물이 범람한 흔적이 발견됐다”며 “홍수로 도시의 식량 기반이 사라진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세종=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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