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탄핵소추 의결 앞두고 박 대통령이 던진 신의 한수… 야권 ‘탄핵 꽃놀이패’ 사라져 대통령 없는 첫 국회 정치 잘하면 내각제 길 열리지만 못하면 대통령제 유지될 것
송평인 논설위원
새누리당 친박계 중진 의원들이 그제 박근혜 대통령에게 요구한 사임이 일견 미국 공화당 중진 의원들이 닉슨에게 요구한 사임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다. 미국 공화당 중진 의원들이 닉슨에게 요구한 것은 즉각적인 사임이고, 새누리당 중진 의원들이 박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은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이다.
박 대통령은 어제 자신의 진퇴와 임기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질서 있는 퇴진’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말로만 질서이지 실제로는 혼란이 시작됐다.
여야는 국회 추천 총리에 대해서도 합의해야 한다. 지금 결정되는 총리는 차기 대선 과정에서 사실상의 국가수반 역할을 맡는다. 당마다 자기한테 유리한 후보를 추천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박 대통령의 어제 발표를 탄핵을 모면하려는 꼼수로 규정하고 탄핵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발표로 새누리당의 비박계 일부가 탄핵소추에 찬성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겼다. 비박계가 전원 가담하지 않으면 야당만으로는 탄핵소추 의결에 필요한 3분의 2를 채우지 못할 수 있다.
그동안 야권으로서는 탄핵소추가 의결되면 박 대통령의 권한을 즉각 정지시킬 수 있어서 좋고, 부결되면 국민의 분노를 부를 것이기 때문에 좋은 꽃놀이패였다. 반대로 여권으로서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결정으로, 탄핵소추가 부결된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나 새누리당이 받게 될 후폭풍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탄핵소추가 부결되면 야권은 어쩔 수 없이 박 대통령이 제안한 ‘질서 있는 퇴진’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고 상황은 여야가 대통령의 사임 시점과 국회 추천 총리를 놓고 고심해야 하는 알고리즘의 첫 단계로 돌아온다. 탄핵소추가 통과돼도 박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될 뿐 상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박 대통령의 결정은 신의 한 수였다. 물론 그 신의 한 수는 대통령직을 사실상 포기한 대가로 둘 수 있었던 값비싼 신의 한 수다. 당장 야권에서는 대통령이 왜 스스로 사임 일자를 정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야권이 ‘질서 있는 퇴진’을 감당할 자신이 없음을 내비친 것이다.
여야는 어찌 됐든 앞으로 대통령의 진퇴와 임기를 놓고 합의해야 한다. 국회가 그토록 주장해 왔던 합의 정치의 장(場)이 주어졌다. 국회가 처음으로 사실상 대통령 없는 정치를 하게 된다. 잘하면 국민이 내각제로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겠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합의하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면 그래도 대통령제가 낫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다. 여야는 공 대신 골칫거리를 넘겨받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