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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혼란’ 폭탄 터뜨린 ‘질서 있는 퇴진’

입력 | 2016-11-30 03:00:00

국회 탄핵소추 의결 앞두고 박 대통령이 던진 신의 한수… 야권 ‘탄핵 꽃놀이패’ 사라져
대통령 없는 첫 국회 정치 잘하면 내각제 길 열리지만 못하면 대통령제 유지될 것





송평인 논설위원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낸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등이 1974년 8월 7일 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방문해 “의회에서 당신에 대한 지지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하원 본회의의 탄핵소추 의결을 앞둔 상황이었다. 닉슨은 이틀 뒤인 8월 9일 사임을 발표했다.

 새누리당 친박계 중진 의원들이 그제 박근혜 대통령에게 요구한 사임이 일견 미국 공화당 중진 의원들이 닉슨에게 요구한 사임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다. 미국 공화당 중진 의원들이 닉슨에게 요구한 것은 즉각적인 사임이고, 새누리당 중진 의원들이 박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은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이다.

 박 대통령은 어제 자신의 진퇴와 임기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질서 있는 퇴진’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말로만 질서이지 실제로는 혼란이 시작됐다.

 여야는 우선 대통령의 사임 시점을 합의해야 한다. 가능한 한 사임을 앞당기고 싶은 쪽이 있고 가능한 한 늦추고 싶은 쪽이 있다. 차기 대선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사임을 가능한 한 앞당기고 싶을 것이고 적절한 대선 후보가 없는 새누리당이나 유력한 대선 후보의 지지도가 낮은 국민의당은 가능한 한 사임을 늦추고 싶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등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이 대선에 출마하려면 선거법을 바꾸지 않는 한 최소한 3개월이 보장돼야 한다. 3개월이란 시간은 사실상 대통령을 탄핵 절차에 따라 퇴출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과 엇비슷하다.

 여야는 국회 추천 총리에 대해서도 합의해야 한다. 지금 결정되는 총리는 차기 대선 과정에서 사실상의 국가수반 역할을 맡는다. 당마다 자기한테 유리한 후보를 추천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박 대통령의 어제 발표를 탄핵을 모면하려는 꼼수로 규정하고 탄핵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발표로 새누리당의 비박계 일부가 탄핵소추에 찬성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겼다. 비박계가 전원 가담하지 않으면 야당만으로는 탄핵소추 의결에 필요한 3분의 2를 채우지 못할 수 있다.

 그동안 야권으로서는 탄핵소추가 의결되면 박 대통령의 권한을 즉각 정지시킬 수 있어서 좋고, 부결되면 국민의 분노를 부를 것이기 때문에 좋은 꽃놀이패였다. 반대로 여권으로서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결정으로, 탄핵소추가 부결된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나 새누리당이 받게 될 후폭풍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탄핵소추가 부결되면 야권은 어쩔 수 없이 박 대통령이 제안한 ‘질서 있는 퇴진’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고 상황은 여야가 대통령의 사임 시점과 국회 추천 총리를 놓고 고심해야 하는 알고리즘의 첫 단계로 돌아온다. 탄핵소추가 통과돼도 박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될 뿐 상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어제 특검 후보가 결정됐다. 앞으로 있을 특검 수사나 국정조사도 박 대통령이 버텨야 기세가 오르는데 어제 결정으로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여야가 질서 있는 퇴진에 박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포함시킬 것인가. 예측하기 어렵다. 대통령 사면이 포함되면 특검 수사는 의미가 축소된다. 물론 여야가 합의해도 사면은 안 될 수 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퇴임 후 기소되면 법원에서 유무죄를 다투게 된다. 탄핵 공방을 벌일 때야 ‘제3자 뇌물죄’니 하며 마구 질러댈 수 있었지만 법원에서 유무죄를 다투게 되면 특검 수사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결정은 신의 한 수였다. 물론 그 신의 한 수는 대통령직을 사실상 포기한 대가로 둘 수 있었던 값비싼 신의 한 수다. 당장 야권에서는 대통령이 왜 스스로 사임 일자를 정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야권이 ‘질서 있는 퇴진’을 감당할 자신이 없음을 내비친 것이다.

 여야는 어찌 됐든 앞으로 대통령의 진퇴와 임기를 놓고 합의해야 한다. 국회가 그토록 주장해 왔던 합의 정치의 장(場)이 주어졌다. 국회가 처음으로 사실상 대통령 없는 정치를 하게 된다. 잘하면 국민이 내각제로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겠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합의하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면 그래도 대통령제가 낫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다. 여야는 공 대신 골칫거리를 넘겨받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