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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사물 이야기]접착테이프

입력 | 2016-11-30 03:00:00


 가족과 사는 데도 몇 가지 약속들은 필요하고 가능하면 지켜야 마음 편한 것들도 꽤 있다. 11월의 가장 큰 약속은 마지막 주 주말에 모여 어머니를 중심으로 김장을 담그는 일이다. 내 어머니는 ‘한겨울 식량은 김치’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는 11월 내내 총각김치, 파김치, 갓김치 등 각종 김치를 담그는 데 공을 들이는 것 같다. 식구들 먹을 것 외에도 나눠주고 싶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나 많은지.

 어쨌든 올해도 무사히 김장을 마쳤다. 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우선 도쿄에 사는 동생네 보낼 김치들을 따로 비닐 포장해서 박스에 담는다. 버릇처럼 황색 박스 테이프를 꺼내려는데 아버지께서 우체국에 가면 된다고 한마디하신다. 2년 전부터인가 해외로 발송하는 김장김치들이 발효돼 터지는 사고를 막고자 우체국에서는 사각 캔처럼 생긴 포장 용기를 비치해 두었고 무게에 따라 그 용기를 사서 담고 송장만 부치면 된다. 그전까지만 해도 비닐 포장한 김치를 박스에 담고 넓은 테이프로 단단히 두르고 둘러야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김장을 마친 후 내가 해야 할 일은 부모님이 미리 우체국에서 가져다 놓은 EMS로 보낼 김치 박스에 붙일 송장을 쓰는 일밖에 없는 것 같다.

 문구용품 중에서 풀이나 테이프 등 접착(接着)의 역사는 7만 년 전 남아프리카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돌조각을 목제 손잡이에 붙여 만든 무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현재와 유사한 형태로 ‘찢어진 책이나 다른 가정용품을 수선하는 데’ 3M의 테이프가 널리 쓰이기 시작한 때는 1940년대 초.

 5학년짜리 조카가 며칠 전 다리가 부러진 안경을 쓴 채 학교에서 돌아왔다. 같은 반 말썽꾸러기 두 명이 안경을 벗어보라고 하더니 그것을 조카에게 돌려주지 않고 뺏어 보라고 서로 던지고 받는 놀이를 했단다. 그 틈에 안경다리는 결국 부러져 버리고. 보다 못한 조카의 단짝 친구들이 안경 뺏기 놀이를 한 애들을 혼내주고는 교탁에 있는 공동 문구용품 통에서 투명 테이프를 찾아내 안경다리에 둘러준 모양이다. 그 꼼꼼한 솜씨에 가족들은 화내는 것도 잠시 잊고는 어쩌면 이렇게 잘 붙여 놓았느냐고 감탄했다. 조카는 단짝 친구들을 칭찬하는 것이 기분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그맘때 덜렁거리기만 할 것 같은 남자애들 세 명이 머리를 맞대고 안경다리에 투명 테이프를 정성껏 두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학교든 집이든 사무실이든, 테이프들은 약속된 장소 어딘가에 갖추고 있는 게 좋겠다. 접착을 해야 할 일이 수시로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테이프가 가장 많이 팔리는 때는 선물 포장이 필요한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둔 때라고 한다.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