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3·1운동 때 서문시장 상인들이 대거 참여하자 일제는 1922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시장을 옮겼다. 이전 직후 한때 기세가 꺾였던 서문시장은 곧 활기를 되찾았다. 광복 후에는 대구의 직물 및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포목 도소매와 철물 도매 분야에서 전국 최대 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올해 6월 문을 연 상설 야시장이 인기를 끌면서 서문시장은 ‘밤이 즐거운 대구 야행(夜行)’의 중심지로 뜨고 있었다.
▷서문시장은 광복 이후 2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화마(火魔)에 여섯 번이나 시달렸다. 그러나 시련이 닥칠 때마다 상인들은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영남권 최대 재래시장답게 다시 번창했다. 2005년 12월 29일 한밤중에 불이 나 1190여 개 점포를 태웠을 때는 “설 제수용품은 모두 서문시장에서 사자”며 대구 사람들이 달구벌을 뜨겁게 달궜을 정도다. 상인이 2만 명이 넘는 서문시장은 대선 때마다 여야 후보들이 반드시 찾는 ‘영남권 현장정치의 1번지’였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