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윤리적 훈련 못받은 지식인들 자존감-자부심 없고 유혹에 쉽게 지배돼 세대교체가. 혁명이 지금 필요한 이유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촛불 행진을 야기한 ‘박근혜 국정 농단’ 안에서 내내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있다. 바로 지식인들의 몰락이다. 최순실의 딸 부정 입학에도 다 교수들이 개입되어 있었고, 공조직의 사적 유용도 다 고시를 통과하거나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영재급 인재들이 동조하거나 주도하여 벌인 일들이다. 국정이 농단될 때, 그런 지식인들이 부화뇌동하지 않고 한 번만이라도 ‘저항하는 힘’을 발휘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강남의 어떤 아줌마에게 ‘지시’를 받을 때, 한 번만이라도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부심이나 자존감 혹은 윤리의식이 스쳐 지나가기만 했어도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은 분명 많이 배워 상층부를 이룬 기득권층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이다.
중국 고대의 주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잡초가 무성한 폐허의 왕궁 터를 지나던 한 지식인이 읊은 시(詩)다. “기장만 무성하고, 피들이 가득 싹을 틔우는구나. 걸음은 더디고 마음속은 어지럽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나의 마음이 아프겠다 하는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찾는가 한다. 아득한 푸른 하늘이여, 이것이 누구의 탓입니까?”(‘시경·詩經’ 왕풍) 지식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무엇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아파하는 사람이다. 시대가 앓는 병을 느끼는 사람이다. 아득한 창공을 보며, 시대를 허물어지게 한 원인을 묻는다. 여기서 비로소 공적이고 윤리적인 치료 행위가 시작된다. 비로소 지식인으로 등장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지식의 건립은 병을 치료하는 윤리적 행위의 결과이다. 이런 과정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당연히 공적이고 윤리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직접 실현하지 않고, 실현된 결과들을 수용만 하는 지식인들에게는 공적이고 윤리적인 훈련을 받을 기회가 사라진다. 생각하지는 않은 채 다른 사람이 한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하고, 문제를 발견하려 덤비지는 않은 채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만 수용하는 방식으로 성장한 지식인은 윤리적일 수 없다. 저항하는 힘이 있을 수 없다. 자존감도 없고 자부심도 없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찾는 탐욕에 지배당한다.
지금 혼란은 지식인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업보를 겪는 일인지도 모른다. 잘못 성장한 지식인들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한, 촛불의 희망은 달성되기 어렵다. 세대교체가 필요하고, 혁명이 필요한 이유이다. 교육의 본바탕을 회복하는 일이 절실하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