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대기자
매일 1만원씩 기부 강성희 씨
“40년 교단 지키며 명예 이뤄… 사회서 받은 혜택 갚아야”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춥고 배고프게 살던 한 시골소녀가 지금처럼 여유와 명예, 건강을 갖게 된 것이 어찌 나 혼자 힘으로 됐겠느냐.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지금 당장, 나부터 나눔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억 원은 큰돈이다. 다른 계기가 있을 법도 하다.
“지난해 겨울에 갑자기 왼쪽 어깨가 참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열도 많이 나고.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꼭 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일이 뭐지?’”
그 절박한 자문자답이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이었다. 만기가 돌아온 적금을 찾자마자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나누고 있었다. 정년퇴직 이후, 매일 1만 원씩 떼 내 한 달에 30만 원을 사회복지기관 10곳에 나눠 기부했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빼먹는 경우가 없도록 나중에는 별도 통장을 만들어 자동이체를 했다. 아너 회원이 된 것도 그런 마음가짐의 연장선이다.
“돈을 모아 큰 기부를 하겠다는 약속은 지키기 어렵다. 갖고 있는 것을 일단 기부하는 게 중요하다. 남에게 베풀다 보면, 나도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게 되고.”
평생 교단을 지켰으니 나름의 교육관이 있을 게 틀림없다. “꿈과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미래세대에 대한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많이 어렵다. 그래도 앞을 보고 도전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사회구성원으로서 소속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찾아, 사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생각대로 사는 그런 젊은이들이 늘어나야 한다. 큰 꿈을 품고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면 더 좋겠고.”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그의 취미는 배우는 것이다. 부동산과 바리스타,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등을 공부해 자격증까지 땄다. 요즘은 영어와 색소폰에 푹 빠져 있다.
“색소폰은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재미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붙으면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위문공연 같은 것도 하고 싶다.”
“사실 돈을 기부한 것은 몸으로 하는 봉사활동은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금회에서 소개한 봉사활동에 몇 번 참여해보니, 그 또한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도 사회공헌형 나눔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싶다.”
그는 꾸준하게 운동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유지하며, 분에 맞는 생활을 하면서, 적당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인생2모작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그의 좌우명은 ‘매일을 끝날처럼’이라고 한다.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자는 뜻일 게다. 주변을 위해서라도 그의 ‘끝날’은 늦게 왔으면 좋을 것 같다.
부부가 함께 회원 정이완 씨
아내와 ‘10년 약속’ 지키려 1억… 사별한 아내 이름으로 또 1억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아내도 없는데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아서 뭣하겠나. 집사람도 부부 회원이 된 걸 하늘나라에서 좋아할 것이다.”
정 씨는 지난해 광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실로 불쑥 찾아와 1억 원짜리 수표를 내밀며 “아픈 아내와 10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러 왔다”고 했다.
“1992년부터 아내가 많이 아팠다. 코에 생긴 종양이 뇌로 전이돼 큰 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다. 다행히 2000년부터 많이 나아졌다. 2005년에 이런 약속을 했다. ‘10년 후에도 둘이 모두 건강하면 좋은 일을 하자’고. 그러고 10년 만기 연금에 가입했다.”
그가 낸 1억 원짜리 수표가 바로 그 ‘좋은 일 연금’이다. 그도 수표를 찾자마자 곧바로 모금회 사무실로 왔다고 한다. 고민은 없었을까.
“사실,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좋은 차를 살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와 10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해온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아내의 병은 다시 도졌고, 지난해 12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정 씨는 아내가 완쾌하면 노년을 멋지게 보내자며 조금씩 돈을 모으고 있었다. 올 5월에 그 돈을 찾아 아내 송영자 씨(향년 74세)의 이름으로 다시 1억 원을 기부했다.
‘부부의 금실이 좋아서’라고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다. 그래도 물어봤다. 그렇게까지 아내를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고.
“나를 위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호강도 못 시켜줬는데, 너무 오랫동안 병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정 씨는 광주사범대(2년제·현 4년제 광주교육대의 전신) 과학과를 나와 2년 동안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전남대 공대 섬유공학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1971년부터 한국감정원에 입사해 그즈음에 생긴 감정평가사시험에 합격했고, 1976년부터 감정평가사로 일하고 있다. 지금도 삼창감정평가법인에서 일하는 베테랑 현역이다.
“1967년 결혼할 때 아내도 중학교 교사였다. 그런데 내가 대학편입하고, 새 직장 잡고, 시험준비 하는 등 생활의 변화가 심하자, 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교사생활을 10년도 채 못하고 접었다. 그게 아주 미안하다. 지금도 함께 고생하던 생각만 난다.”
부부는 슬하에 2남 1녀를 뒀다. 큰아들(48)과 딸(37)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작은아들(46)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 딸은 입양을 했다. “아내가 딸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농담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정말로 입양을 하더라.” 딸 얘기는 아내가 20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나누고 베풀기를 좋아했다는 말끝에 나왔다.
자식들은 기부를 어떻게 생각할까. “애들에게 안 물어보고 결정했다. 나중에 사정을 말하니 ‘잘하셨다’고 하더라.” 손자 셋에 손녀 둘을 뒀는데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가끔 화상통화도 하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하다고 아쉬워했다.
“눈물나도록 감사하게 혼자서 잘살고 있다. 가사도우미가 청소나 밥 같은 것은 해주고 있고.” 그러나 ‘집안에 아직도 아내의 영정을 잘 모셔두고 있다’는 말에서 ‘잘살고 있다’는 말은 달리 해석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어봤다.
“아내를 간병하다 알게 됐는데 요양원 같은 데서 봉사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 그런 봉사는 체력도 필요하다고 해 요즘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부부는 확실히 닮아가는 것 같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