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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99일간 ‘경영 빙하기’… 현대는 대북사업 ‘쑥대밭’

입력 | 2016-12-03 03:00:00

[최순실 특검]기업들의 특검 잔혹사




 

2003년 대북송금 특검(아래 사진)과 2007년 삼성 특검은 당시 사회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만큼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브리핑이 이뤄지던 특검 사무실에는 100명 이상의 기자들이 상주하며 수사 내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DB

과거 특별검사 수사들 중 특정 기업이 핵심 타깃이 된 적이 여러 번 있다. 2003년 ‘대북 송금 특검’ 때는 돈을 송금한 현대그룹이 중심에 있었고, 2007년 ‘삼성 특검’은 아예 삼성그룹이라는 한 기업을 겨냥한 특검이었다. 1999년 ‘옷 로비 특검’의 경우 신동아그룹 측에서 폭로한 검찰 수뇌부 비리가 특검 출범의 배경이 됐다.

 이번 ‘최순실 특검’에는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한진, 한화, CJ 등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한꺼번에 연루돼 있어 역대 어느 특검보다 재계에 미칠 영향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용두사미로 끝난 삼성 특검


 

2007년 11월 22일 국회에서 삼성 특검 법안이 통과되는 순간 삼성그룹의 시계는 멈춰 섰다. 전현직 검찰 고위 간부에 대한 뇌물 제공 의혹으로 시작된 특검으로 인해 삼성의 ‘경영 빙하기’는 특검 수사가 끝난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다.

 특검이 총수 일가를 정조준함에 따라 삼성그룹은 바짝 긴장했다. 특검팀은 출범 4일 만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개인 집무실인 서울 승지원과 그룹 내 2인자였던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 등 주요 임직원 6명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현재 부회장), 홍라희 리움 미술관장, 이 회장 등 총수 일가도 차례로 소환했다.

 당시 삼성그룹에서 특검 관련 대응 업무를 맡았던 A 씨는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총수 소환은 기업으로서는 가장 피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차려졌던 특검 사무실 주변 도로가 워낙 좁아서 취재가 과열될 때는 인명 사고가 날 우려도 적지 않았다. 소환 통보를 받은 이후 며칠 간은 모두가 초긴장 상태에서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전했다.

 삼성 특검이 도입될 즈음 재계에서는 큰 불만이 표출됐다. 검찰이 이미 진행 중이던 수사를 특검이 반복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법안 통과 시점을 전후로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5단체는 “검찰이 대규모 수사 인력을 투입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마당에 수사 초기부터 특검을 도입할 필요가 있는가”라며 “수직, 수평적으로 수많은 기업과 긴밀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 삼성그룹의 경영이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된다”라고 연일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삼성그룹과 연관된 중소기업들의 우려도 컸다.

 당시 삼성그룹에서 근무했던 C 씨는 “특검 전 검찰 조사와 같은 패턴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라며 “업무가 마비되는 압수수색이 또 들어왔고 임직원들이 줄줄이 불려 가면서 정작 사업은 뒷전이 됐다”라고 전했다.

 1월 10일 활동을 시작한 특검은 99일간의 수사 끝에 이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등 삼성 전현직 임직원 10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특검 출발의 계기였던 검찰 고위 간부에 대한 뇌물 제공 의혹은 모두 사실무근으로 결론이 났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던 4월 18일 조준웅 특검은 “현행 특검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답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수사 대상에 대한 법적 기준이나 절차 없이 무엇이든 국회에서 정하면 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삼성 비자금 의혹 특검 법안에는 이미 재판이 종결돼 확정된 사건과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 등이 수사 대상에 포함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회장은 특검 수사 발표 후 6일 만에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을 내놓고 경영 일선에서 퇴진했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 온 전략기획실도 해체됐다.


‘비극’으로 이어진 대북 송금 특검


 2003년 4월 17일 시작된 대북 송금 특검은 노무현 대통령의 수사 기간 연장 거부로 6월 25일 종료됐다. 특검은 수사를 끝내면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과 임동원 전 국정원장, 이기호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이근영 전 산업은행 총재,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등 8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전달했다는 150억 원의 실체를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이 의혹은 검찰로 넘어갔다.

 정 회장은 특검에 이어 150억 원의 비자금 조성에 대한 검찰의 추가 수사를 받게 되자 정신적 압박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해 8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틀 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 대북 송금 의혹 사건을 맡았던 송두환 특검이 나타났다. 송 특검은 그 자리에서 “(정 회장이 지휘하던) 대북 경협 사업은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하며 국가 전체적인 차원에서 좋은 결실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대북 송금 특검은 정치적 파장과 별개로 짧은 시간에 적잖은 성과를 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수사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현대그룹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당시 현대상선에서 근무했던 현대그룹 임원 D 씨는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았다”라고 했다.

 현대그룹은 2000년 ‘왕자의 난’에 이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이 각각 계열 분리돼 나가면서 과거의 위용을 이미 잃은 상태였다. 주력 계열사인 현대건설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2002년 채권단으로부터 경영권을 박탈당했고 세계 5위 해운사였던 현대상선은 당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런 현대그룹에 대북 사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1998년 11월 첫 배가 출항했던 금강산관광은 2003년 9월 육로 관광으로도 확대될 예정이었다. 그해 6월에는 개성공단 착공식도 있었다. 글로벌 투자업계에서는 대북 사업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120조 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2002년 9월 국정감사에서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이 대북 송금 의혹을 처음 폭로한 뒤 대북 사업은 ‘대북 송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을 수용하면서 현대그룹은 ‘패닉’에 빠졌다. D 씨는 “대북 사업은 정주영 창업주의 필생의 사업이었고 그룹을 물려받은 정몽헌 회장도 투자 의지가 어느 사업보다 컸다. 대북 사업만큼은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임직원들에게 특검은 엄청난 충격이었다”라고 기억했다.


사상 최대의 특검에 쏠린 재계의 눈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특검이 사상 유례가 없는 큰 규모로 꾸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들에 대한 칼날도 매서울 것으로 예상되면서 재계에 미칠 파장도 어느 때보다 클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은 겉으로는 큰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 이미 검찰 수사에서 모든 사실을 밝혔는데 특검이 시작되면 총수들에 대한 줄소환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압수수색도 추가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특검은 1차 수사(준비 기간 20일+수사 기간 70일)에 이어 한 차례 기간 연장(30일)도 할 수 있어 내년 4월까지 각 기업의 경영 활동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10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검찰이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미 가져갈 자료는 다 가져갔는데 또 무슨 수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라며 “검찰 수사, 국정조사, 특검이 차례로 이어지면서 경영 활동은 아예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각 기업에는 우선 총수들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6일 국정조사 청문회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번 사태에 깊숙이 개입된 일부 기업은 특검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에 본격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10대 그룹 관계자는 “수사 범위가 어떻게 정해질지 모르지만 10대 그룹 대부분이 연루돼 있는 만큼 이번 특검은 한 기업이 아닌 재계 전체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덕 drake007@donga.com·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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