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국립대 교수 신장섭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미국식 기관투자가 행동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10월 삼성전자에 지주회사 전환과 30조 원의 특별배당을 요구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요구에 대해 “좋은 제안이라면 주가가 올라 이득인데 왜 거액의 배당을 요구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역사의 페이지를 채우는 일은 무척 어렵다. 굴곡이 많았던 한국 현대 경제사도 그렇다. 최근 발간된 책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는 전직 고위 관료들의 증언을 통해 1997년 외환위기 극복과 새로운 경제 시스템 정착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해 눈길을 끌었다. ‘구조조정 집도의’인 관료들과 다른 관점에서 외환위기를 보는 소수의 시각도 있다. 얼마 전 ‘경제민주화…일그러진 시대의 화두’라는 책을 펴낸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54)는 “지난 20년간 경제 개혁의 성적표는 성장 고용 분배에서 다 낙제점이었다”며 1990년대 한국 경제와 외환위기 구조조정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한다. 지난달 방한한 그를 만났다. e메일로 추가 인터뷰도 진행했다. 》
박용 기자
―1990년대 한국 경제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1997년 외환위기 이전 한국 경제를 ‘성장-내수-고용-분배’가 공존하는 ‘융성기’로 봐야 한다. 정부와 민간이 협력을 잘했고, 재벌 체제가 긍정적으로 기능해 경제 기적을 이뤘다. 경제력 집중의 문제가 있었으나 성장을 하는 데는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터지자 한국 모델이 잘못됐다는 ‘구조적 위기론’이 득세했다.”
“문제가 있었지만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다. 경제 발전의 이행 과정에서 몇 가지 실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구조적 문제로 진단하고 지나치게 구조조정을 단행해 성장 잠재력까지 깎아 먹었다. 이후 경제 민주화 등이 추진됐지만 분배는 더 나빠졌다. 구조조정을 강조한 사람은 ‘구조조정이 덜 됐으니 더 센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대안밖에 내놓지 못한다.”
―1990년대 한국 모델의 장점은 뭔가.
“당시 한국의 재벌과 제조업이 국제적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분배도 좋았다. 현대자동차가 품질이 좋은 자동차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삼성이 반도체시장에서 세계 1등으로 올라섰다. 조선업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렇게 번 돈에 은행 돈을 더 빌려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마침 세계화 바람이 불어 신흥시장이 열리던 때였다. 경쟁력을 쌓고 해외 시장에 나가기 위해 투자를 늘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자리가 늘고, 소득이 증가해 분배도 좋아졌다.”
“당시 대표적인 과잉투자 사례로 지목된 한보철강은 중국 진출을 위해 서해안에 공장을 지었다. 대우의 세계 경영도 중국 베트남 동유럽 등 신흥시장 투자였다. 이 신흥시장이 2000년대 들어 엄청나게 커졌다. 신흥시장 개척을 위한 선제적, 공격적 투자로 봐야 한다. 제대로 됐다면 한국이 더 크게 벌 수 있었다. 구조적 위기라고 해서 이 기회를 다 잘라 내 버렸다.”
―당시 기업 부실이 컸다.
“일본도 경제개발을 할 때 기업 부채비율이 500%대까지 올라갔다. 한국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높은 건 자금 조달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 미국 대만 제조업과 비교하면 한국 기업의 영업이익이 제일 좋았다. 하지만 이자 비용 등을 빼고 난 경상이익은 낮았다. 중화학공업 등에 투자를 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끌어왔기 때문이다. 대만 경제는 중소기업 중심이어서 대규모 투자를 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 기업은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많이 조달해 은행의 이자 부담이 크지 않았다.”
―빚이 많다면 위기관리를 더 잘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저서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한국어판 특별기고문에서 “한국은 당시 저축률이 높아 외국 자본이 필요하지 않았다. 급격한 자본 자유화는 한국을 금융위기로 몰고 갔다”고 비판했다.
―기업보다 정부 책임이 크다는 건가.
“기업은 위험을 지는 곳이다. 돈을 빌려주는 금융회사가 1차 리스크 관리를 해야 했다. 국가 전체의 리스크 관리는 정부가 해야 한다. 물론 재벌도 잘못이 있다. 너무 낙관적이었다. 굳이 책임을 묻자면 정부, 그 다음은 금융회사, 세 번째는 재벌이다. 그런데 재벌이 더 큰 문제인 듯 다뤘다.”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크게 반발했다는데….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맡고 있던 김우중 회장은 1998년 강연 등을 통해 ‘이 체제가 오래가면 한국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제 금융시장에 비판적이었고 정리해고에도 반대했다. 당시 ‘황야의 무법자’와 같은 대접을 받았지만 맞는 진단이었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 우리처럼 심하게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GM을 지원해 살려 놨다. 이중 잣대라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국익에 충실한 것이다. 우리는 어땠는가.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역사책이 안 바뀐다.”
신 교수는 2014년 ‘김우중과의 대화’라는 책 등을 내고 국제통화기금(IMF)식 구조조정은 잘못된 재벌 개혁의 사례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대우그룹에 대한 당시 관료들의 생각은 다르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대우그룹이 무너진 것은 1인 경영 때문”이라고 비판했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김 회장이 시장 변화를 못 읽었다”고 지적했다.
―문어발 확장과 선단식 경영 등 재벌 체제의 문제가 있었다.
“지나친 계열사 간 지급 보증과 내부 거래는 줄여야 한다. 하지만 그룹 체제의 장점이기 때문에 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한도를 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면 된다. 이걸 못 하게 하니 한국 기업의 확장 능력이 크게 줄었다. 한국은 상속세율도 높고, 공익법인 설립을 통한 승계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가족경영의 씨가 마를 것이다. 지주회사로 전환한 SK와 LG도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 문제를 겪을 것이다. 그게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는가. 존경받는 재벌 모델을 만들어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게 낫다.”
―존경받는 재벌 모델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재단을 통한 승계를 허용하되 고용과 분배 목표를 달성하는 ‘생산적 전위대’로 만들자는 것이다. 재단으로 넘어온 돈으로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적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2부 리그’ 기업을 새로 만들어야 고용과 분배가 가능한 생산적 복지를 할 수 있다. 기존 자회사로 구성된 재단 소속의 ‘1부 리그’ 기업은 지금처럼 국제 경쟁을 하면 된다. 투자와 고용을 전제로 재단을 통한 승계를 허용하자는 얘기다.”
―‘적당한 이윤 추구’가 가능할까.
“기업들의 행동양식은 목표 함수가 어떻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 유통회사인 코스트코는 이익률을 3, 4%로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익이 많아지면 물건 값을 낮춘다. 그래도 회사가 잘나간다. 직원 복지도 좋다. 비용을 쥐어짜는 월마트와 정반대 경영을 하는 회사다. 이런 목표 함수를 가진 기업들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에 대해 부정적인데….
“과거에 비해 경제 자유화는 꽤 진행됐다. 경제 민주화는 경제력 집중과 분배 문제 악화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재벌만 갖고 얘기하니 맞지 않는 처방이 나온다.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 사태를 보면 재벌은 뜯기는 대상이다. 삼성전자가 잘나간다고 해도 지분 0.6%를 보유한 투기자본이자 악명 높은 벌처펀드인 엘리엇한테 30조 원의 특별배당 협박을 받는 시대다. 갤럭시 노트7 생산 중단 사태를 보듯이 기업들은 고객에게 꼼짝 못 한다.”
―무엇이 문제라는 건가.
“경제 민주화 법안이 주주 행동주의, 정확히는 기관투자가 행동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이런 처방은 분배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경영자는 어떻게 생산을 늘릴까를 고민하지만, 펀드매니저들은 생산 활동에 나온 걸 어떻게 빼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자들은 마지막 남은 이익 일부를 배당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자사주 매입과 배당 등을 요구하며 제 몫을 먼저 챙기려고 한다. 그러니 기업들은 사람을 자르고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이런 식으로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1 대 99’의 사회가 됐다. ‘재벌을 때려잡자’는 정서에만 호소하는 경제 민주화는 외환위기 못지않은 독약이 될 것이다.”
―그럼 어떤 대안이 필요하다는 건가.
“한국이 갖고 있던 장점을 살리는 시스템을 정립해야 한다. 중소기업에 복수의결권 등을 도입해 산업자본이 목소리를 내게 해줘야 한다. 산업과 금융자본과 균형을 맞춘 규제가 필요하다. 대기업이 계열사 지분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기관투자가들이 공동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을 막는 규제도 필요하다. 공정거래법이 기업 담합은 규제하면서 기관투자가들의 담합은 사실상 용인하고 있다.”
―대기업의 투자도 늘려야 한다.
“대기업이 쥐어짜서 중소기업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대기업이 예전만큼 투자를 하지 않으니 중소기업이 성장할 여지가 줄어들었다. 대기업이 고용을 늘리는 투자를 국내에서 할 수 있게 정책적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중소기업의 성장을 지원해 한국 경제의 허리도 키워야 한다. 이건 대기업이 아니라 정부의 책임이다. 외환위기 이후 중소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산업금융 시스템이 해체됐다. 투자를 하려면 부채비율이 높아지는데, 이 비율이 높으면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풀어줄 필요도 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