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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의 시간여행]역사 속 하야

입력 | 2016-12-05 03:00:00


영조가 1746년 편찬한 제왕학 교재.

 옛날에, 왕이 물러나겠다고 하면 신하들은 기겁하며 극구 말리고 나섰다. 왕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고,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야를 환영한다는 따위의 반응은 있을 수 없었다. 목청껏 결사반대를 외치는 것이 유일한 길이며 현명한 처신이었다.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조차 제발 그러지 마시라며 엎드려 비는 판국이었다. 종신제 전제군주이기 때문이었다. 하야라는 말도 쓰이지 않았다. 선위(禪位)라고 했다. 살아생전 왕위를 물려주는 일. 죽기 전엔 안 물려줘도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영구적 집권 권리를 보장받은 임금이 그만두겠다는 언급을 불쑥 꺼낼 때마다 아랫사람들은 시험에 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장례식이 곧 즉위식이 되는 전통에서 그 같은 돌출 발언은 안정을 깨는 비상사태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왕조에서만도 그 같은 사례가 더러 있다. 업적이 많은 왕들 중에서 꼽자면 영조와 태종이 대표적이다.

 “내가 즉위한 지 15년. 신하가 왕명에 불복하고 기강이 한심한 세태라, 임금 노릇하기 어렵다.”

 이러면서 영조 임금은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다. 이 말에 중신들이 달려와 사색이 되어 빈다. 제발 없던 일로 거두어 달라고, 온 나라가 시끄러워지기 전에.

 이에 임금이 던지는 한마디.

 “나를 이미 임금 취급도 안 하는데 소란스러울 게 뭐 있겠나.”

 그러면서 덧붙인다,

 “내가 짐을 벗더라도 어찌 민생을 소홀히 하겠으며 국방을 경시하겠는가.”

 수십 명의 신하가 몰려들어 번갈아 아뢰는 말이 수천 마디에 이르렀다. 마침내 왕은 못이기는 척 퇴위 의사를 철회했다.

 이날의 전말을 기록한 사관(史官)은 말미에 해설을 달았다.

  ‘임금이 노론 소론 양편 인사를 아울러 써서 탕평의 정치를 하였지만 당파 사람들(黨人)의 의식이 개선되지 않는 점을 매우 괘씸히 여겨, 종종 집무를 거부하고 식사도 물리치며 세태를 거론하곤 했다. 이번에 다시 퇴위하겠다고 선포했는데, 신하들은 스스로를 바로잡고 경계할 생각은 않고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하는 것으로 미봉책을 삼았으니, 통탄스러워 견딜 수 없다.’(영조실록 1739년 1월 11일자)

 일찍이 태종도 조기 퇴진 의사를 밝혀 조정을 뒤집어지게 한 바 있다.

 “나의 재위 벌써 18년. 주야로 늘 송구한 마음에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이 자리를 세자에게 물려줄까 하노라.”

 자지러지는 함성을 뒤로하고 태종은 아예 옥새를 세자에게 내주었다. 신하들의 통곡 속에 세자는 당황하여 받지 아니하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임금의 한마디.

 “주상이 아직 어리므로 장년이 될 때까지는 국방은 내가 살필 것이고,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은 내가 함께 의논하겠다.”

 이 말에 중신들은 “이제야 상감의 뜻을 알았나이다” 하며 왕위 이양을 공식화하였다.(세종실록 1권 총서)

 그 왕법의 시대에, 선출되지 않은 국왕에게 물러가라 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중 민주의 시대인 요즘 선출된 국가수반에게 헌법과 관계없이 무조건 임기를 중단하라는 의견이 많다. 법치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실망과 반감에서일까, 입헌 정치의 소프트웨어가 따라가기는 아직 벅찬 단계여서일까.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