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 서울대 의대 교수·정신분석학
병사 지경의 ‘암’에 걸린 나라
정치권의 무능함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들리는 소리는 크고 높지만, 믿을 만한 ‘종양의학 전문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날로 악화되어 가는 암을 수술로 잘라낼지, 약물로 녹일지, 방사선으로 죽일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오락가락합니다. 기껏 한다는 일이, 수심에 차서 모인 가족들에게 어떤 치료를 원하는지를 자꾸 물어보고 있습니다. 약삭빠르게 경쟁사 ‘항암제’를 물리치고 자기 것으로 시장을 선점하려는 모습도 보입니다. 국가적 위기가 경사라도 되는 양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도 눈에 띕니다.
암 환자의 심리 적응과정 이론을 빌리면 현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우선, 암 진단을 받으면 누구나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어”라며 부정(否定)을 합니다. 그러나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약발이 떨어집니다. 금방 좌절감에 빠져 “이것도 나라냐”라는 한탄이 나옵니다. 한탄은 분노로 이어집니다. 현 상황에서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세금 꼬박꼬박 냈는데”에, 부정입학 사례로 “밤새워 공부해야 전혀 소용이 없구나”가 겹쳐서 촛불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좌절과 한탄에도 현실 직시해야
집단 속에서의 분노 표출은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화되면 몸과 마음이 견디지 못하고 탈진으로 이어집니다. 파괴적인 에너지로 쉽게 전환되기도 합니다. 다음 단계인 ‘협상 타협’으로 넘어가서 치료 방법을 찾아 암을 치유해야 하지만 타이밍을 놓치면 암이 악화됩니다. 이제 법과 시스템에 대한민국의 치료를 맡기고 국민은 잘 지켜보아야 합니다. 어렵지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치료 경과에 따라 치료법이 바뀔 수도 있음을 암 환자의 가족처럼 양해해야 합니다. 완벽한 치료는 없습니다. 때로는 심한 부작용도 참아내야 합니다. 치료가 종결되면 우울감이 찾아옵니다. 끝으로, 있는 그대로의 대한민국을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부정, 분노, 협상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는 원래 암 환자의 심리 적응 단계를 연구한 퀴블러로스의 이론입니다. 범위를 넓혀 스트레스 상황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요점은 스트레스 적응이 단계를 밟아 시간이 걸려 이루어지며 특정 단계에 고착되면 적응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역사는 늘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역사였습니다. 나라가 암에 걸렸으면 암을 제대로 치료하면 됩니다. 전이와 재발도 막아야 합니다. 신체 일부를 확 잘라내는 공격적인 치료법은 후유장애를 남깁니다. 그렇다고 전이된 암세포를 남겨놓으면 재발합니다. 좌절과 분노 속에서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병든 대한민국의 치료를 마음 놓고 맡길 ‘믿을 만한 명의’가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내년에는 눈을 부릅뜨고 제대로 골라야 ‘대한민국 정치의 건강 시대’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암 환자 곁에는 ‘돌팔이 명의’들이 모여 ‘가짜 치료법’을 팔아먹으려고 안달을 합니다. 말만 교묘하고 교활한 ‘돌팔이’에게 속아서 돈을 뺏기고 건강을 해치면 가슴을 치며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온몸에 암세포가 퍼지면, 그때는 어떤 명의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돌팔이’ 아닌 명의 찾는 지혜를
차기 대통령을 제대로 뽑으려면 국민 여러분이 각자의 일상에 촛불을 밝히고 밤새우면서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꾼이 아닌 참된 정치가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촛불을 밝혀야 할 진정한 이유이자 목표입니다. 좌절-분노-우울의 악순환이 대한민국에 반복되는 것을 예방해야 후손들에게 ‘나라다운 건강한 나라’를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정도언 서울대 의대 교수·정신분석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