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주막의 모습을 담은 신윤복 풍속화.
황광해 음식평론가
난이 일어난 다음 달인 4월 2일, 경기감사 이정제가 보고한다. “(한강의) 송파나루부터 공암나루(서울 강서구 가양동)까지 모든 배들은 강의 북쪽으로 옮겨두고 사사로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지금의 이른바 주막(酒幕)은 옛날의 관정(關亭)으로서, 적도(賊徒)가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 낮에는 장터에서 모이니, 착실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란세력 혹은 수상쩍은 자들이 묵는 곳은 주막이다. 주막은 예전의 관정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관정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역원(驛院)이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각 지역에 역(驛), 원(院), 참(站), 점(店) 등을 두었다. 공적 업무로 지방에 가는 관리들은 주로 지역 관아의 객사(客舍) 등에서 묵었다. 객사가 없는 곳에서는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거나 잠을 잤다. 역은 30리 간격으로 하나씩 세웠다. 역, 원, 참도 없는 산골이나 시골에서는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는 수밖에 없었다.
1574년 12월(선조 7년)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선조와의 경연에서 “경기도의 탄막(炭幕)은 나그네가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엄습하여 그 집을 불태웠다”고 보고한다(미암집). 탄막은 주막인데 숙박시설이다. 술도 마시고 잠도 잔다.
탄막은 땔나무와 숯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덕무(1741∼1793)는 “점은 주막인데, 술(酒)과 숯(炭)의 발음이 비슷하여 ‘술막(酒幕)’이 숯막(炭幕)이 되었다. 관청의 문서에서도 탄막으로 쓰고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주막은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점, 주점, 주막, 탄막 등 여러 이름으로 나타난다.
조선의 생산능력이 늘어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유동 인구가 늘어난다. 역참을 이용할 수 없는 양민, 상인들은 주막을 이용한다. 전국에 주막이 급격히 늘어났다. ‘간편하게 술 한잔 마시는 공간’으로 시작한 주막은 점차 술 마시고, 식사하고, 잠도 자는 공간으로 발전한다.
정조 13년(1789년) 2월 ‘일성록’의 기록. 황해도 신계에 살던 한조이는 남편의 억울한 유배를 풀어줄 것을 호소한다. “남편 이귀복과 저는 길가에 살면서 탄막으로 업을 삼고 있었습니다. 재작년(1787년) 5월, 나그네가 저희 탄막에 와서 아침을 사먹고 있는데 (황해도) 곡산의 기찰 장교가 그를 잡아가고, 남편도 잡아가서 유배 보냈습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