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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품 위조자들의 ‘저승사자’, 승려처럼 머리깎고 다니는 이유는?

입력 | 2016-12-07 10:51:00


[풍수학박사 안영배기자의 ‘도시의 異人 열전’] ⑦ 예술품 감정학자 이동천 박사

예술품 위조자들이 벌벌 떠는 진위(眞僞) 감별사



서울 인사동 고미술 거리에 '그가 떴다' 하면 예술품 거래업자들이 긴장한다. 예술품을 경매하는 사람들도 그가 나타나면 신경을 많이 쓴다. 그는 예술품의 진짜와 가짜를 쾌도난마식으로 구별하는 감정학자다. 진짜로 알려진 미술품을 그가 가짜라고 판정해 거래나 전시가 깨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가짜를 진짜처럼 속여 팔아먹는 위조자들에게는 그는 저승사자나 마찬가지다.

예술품 감정학은 돈이 끼어드는 '위험한' 학문이다. 감정학자는 늘 돈의 유혹에 노출돼 있다.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관해서는 학연이나 지연 같은 정실(情實)도, 이해를 따지는 계산도 일절 배제한다. 달콤한 유혹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이들은 그를 독선주의자라고 몰아붙이거나 시장에서 왕따를 시키기도 했다.

"스스로 내 머리를 바싹 깎고 다니는 이유가 있다. 세상으로부터의 유혹과 위협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다. 돈과 결탁하면 감정학은 뿌리내릴 수 없다. 가짜는 분명히 퇴출돼야 하고, 진짜는 올바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다."

승려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는 이동천 박사(51)의 말이다.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그의 부친은 전라북도향교재단 이사장과 문화재위원을 지낸 이태연 선생(91)이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고미술을 사랑한 그는 일찌감치 중국 유학을 떠났다. 1994년부터 중국 서화(書畵) 감정의 최고봉인 양런카이(楊仁愷·1915~2008) 선생의 수제자로 감정학을 배웠으며, 중국 국학 대가인 펑치융(馮其庸) 선생으로부터 문헌 고증학을 사사했다. 그가 스승으로 모신 두 사람은 중국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국보급 인물들이다.

그는 중국인 스승의 지도를 받아가며 1999년 중국 중앙미술학원에서 감정학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다. 같은 해 10월부터 랴오닝(遼寧) 성 박물관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현재도 직위를 갖고 있다). 중국 선양(瀋陽)이공대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200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명지대 대학원에서 '예술품 감정학과'를 국내 최초로 개설했다. 그는 2년간 주임교수로 일하며 우리나라에 '감정학'이란 새로운 학문의 씨앗을 뿌렸다.

그가 2001년에 진위(眞僞) 작품 대비전인 '명작과 가짜 명작'(예술의전당) 전시를 기획해 미술계를 화들짝 놀라게 한 일은 지금도 유명하다. 2004년부터는 지금까지 서울대 대학원에서 '작품감정론'을 강의하고 있고, 중국을 오가며 감정 교육과 미술품 투자를 연구하고 있다.

전시회에서 진짜로 세탁하려 한 가짜 그림

얼마 전 그는 '미술품 감정 비책'(라의눈)이란 책을 발간했다. 그는 책에서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는 물론 '뉴델리'라는 작품도 위작으로 감정해 또 한 번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책 발간 당시인 7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 화백 1주기 추모전'이라는 이름으로 '뉴델리'라는 문제의 작품을 전시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틈틈이 써온 원고를 모아 책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느 정도 출판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천경자 화백의 추모전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1998년 천 화백이 직접 서울시에 기증한 93점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기에 개장 바로 다음 날인 6월 15일에 서둘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을 찾았다. 역시 좋았다. 한 작품, 한 작품 요모조모 살펴보는데 순간 진작(眞作)이 아닌 위작(僞作)이 눈에 들어왔다. 천 화백 자신이 직접 기증한 작품들에서 위작이 발견돼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뉴델리'처럼 기증 작품이 아닌 다른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두통이 줄어들었다. 전시 작품을 관람하는 내내 절망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천 화백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말한 '미인도'의 진위 문제로 미술계뿐 아니라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 그때, 그것도 작가로부터 93점이나 기증받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또 1주기 추모전이라는 엄숙한 행사에서, 가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 감정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참기 어려웠다. 며칠을 고민한 후, 영원히 기록으로 남길 생각으로 추모전 기간 중에 '미술품 감정 비책'을 통해 '뉴델리'와 '미인도'의 위작 근거들을 밝혔다."

만약 이 전시회에서 '뉴델리'가 아무 지적도 받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족보(전시회 기록)를 가진 진짜로 '세탁'될 뻔했다. 그리고 거액에 거래될 수도 있었다.

이 박사가 천 화백의 미인도를 가짜라고 감정한 후 검찰의 의뢰를 받은 프랑스 뤼미에르 감정팀도 최근 천 화백의 미인도를 가짜라고 감정했다. 이에 대해 미인도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감정 방법에 의구심을 표시하며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프랑스 감정팀의 감정 방법을 어떻게 평가할까.

"작품의 화면을 특수카메라로 찍어 단층으로 나눠서 감정하는 방법은 붓글씨처럼 일필휘지로 그리거나 옅게 수채화처럼 그린 그림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천경자 화백처럼 공을 들여 안료를 겹겹이 칠해 두텁게 그리는 그림을 감정하는 데는 유효하다고 본다. 마치 작은 실금으로부터 큰 둑이 무너지듯, 위조자의 작은 실수로부터 위작은 밝혀진다."

프랑스 감정팀의 감정 방식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작품을 감정하는 방법에는 목감(目鑑)과 고증(考證)이라는 두 가지 기법이 있다고 말한다. 목감은 오래 교육 받고 훈련을 거친 눈으로 작품의 진위를 가리는 방법이고, 고증은 작품에 대한 사실 검증을 통해 과학적으로 감정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목감은 수많은 고증을 통해 얻은 인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고증은 목감을 기초로 깊이 있는 검증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위조자들도 이런 감정 기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교묘하게 위조방법을 발전시켜나간다는 것. 어찌 보면 감정가들과 위조자들은 경찰과 범인처럼 쫓고 쫓기는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미술시장에서 그나마 위작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서는 '감정가 실명제(鑑定家 實名制)'가 필요하다는 게 이 박사의 주장이다. 감정을 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자는 것이다.

"나는 8년 전 '진상: 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동아일보사)'이라는 책을 펴낸 이후 줄곧 감정가 실명제를 주장해 왔다. 이번 '미술품 감정 비책'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며, 감정의 구체적인 사례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감정 방법까지 공개했다. 감정가 실명제를 주창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감정가 자신이 감정한 작품에 실명을 남겨 책임을 지게 하자는 것이다. 둘째, 감정은 협의나 합의의 대상이 아니고, 진위 감정은 몇몇이 모여서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감정가 개개인이 작품 하나하나의 감정에 책임을 지는 게 옳다고 본다. 올바른 하나하나가 결국 올바른 전체를 이룬다고 보는 게 내 생각이다."

추사 김정희가 1840년에 쓴 서찰과 이를 감정한 이동천의 감정 소견서



감정가 실명제가 필요한 이유

그는 최근 국가가 나서서 '감정업 등록제' 실시나 '국립미술품감정원' 설립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근본 대책이 아닌 미봉책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

"국가가 추진하는 정책이 미봉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행하기 전에 반드시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새로운 등록제는 기존 진위 논란의 원인 제공자들에게 면죄부를 줘서 더러워진 옛 간판을 떼고 새 간판을 달 기회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동안 무분별하게 뿌려진 위작에 대한 아무런 정리도 하지 않고, 새로운 제도를 실시한다는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미술시장 정화에 대한 희망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만에 하나 신설한 국립미술품감정원에서 특정세력이나 비전문가가 전문가 행세를 한다면 오히려 미술시장은 더욱더 위험해질 것이다. 따라서 외형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담당 공무원, 사법경찰들에게 제대로 된 맞춤 감정교육을 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이들이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줘야 한다. 감정원들은 각자 자신이 감정한 작품의 진위 판단에 대한 구체적 근거와 진위 감정의 과정을 투명하게 기록하고, 이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출판물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공시해야 한다."

그는 감정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미술품 감정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미술품 창작에 대한 기본 지식과 훈련이 필요하다. 미술사 지식과 미술에 관련된 인문학적 지식도 배워야 한다. 지금과는 학문적 기초가 달랐던, 30년 이상 된 강의 노트에 적힌 낡은 지식에 얽매이면 그때 속았던 위작에 지금 또다시 속는다. 잘못된 시작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 모든 것은 비교 검증돼야 한다. 미술품을 오래 다뤘다고 감정을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다. 맞춤전문교육을 받았을 때만 가능하다. 미술품 감정은 미술평론이나 미술품 보존 처리와는 출발점이 전혀 다른 전문 분야다."

사실 미술품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위조 작품의 제작과 유통 자체가 돈이 개입된 프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예술품을 수장하고자 할 때도 순수한 열정과 재력만으로는 안 되고, 이 세계를 이해하고 공부해야만 한다. 공부해야 아는 만큼 보이고, 또 보여야만 예술품을 더 사랑할 수 있다. 이 박사는 수없이 많은 실전을 통해 진위 감정 능력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면서 스승에게 배웠던 경험을 소개했다.

"스승과 함께 중국 전역에서 열리는 경매장을 숱하게 찾아다니며 그림을 엄청나게 많이 봤다. 1995년 봄 베이징에 있는 가덕(嘉德)경매에 스승(양런카이)과 함께 갔을 때였다. 스승은 중국 정부가 인정한 유일한 '인민감상가'이다 보니 몰려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쪽으로 가고 나는 혼자 종일 그림을 봤다. 저녁에 숙소에서 만났을 때 스승은 '오늘 나온 것 중에 어느 그림이 제일 좋더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명말(明末)의 충신이자 서화가인 예원로의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스승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테스트를 수시로 받았다."

스승의 도제식 교육은 매우 철저했다고 한다. 제자는 한 학기에 한 달 정도는 중국 전역의 박물관을 순회해야 했다. '이 사람은 내 제자니 찾아가거든 물건을 보여주라'는 스승의 편지 한 통을 받아들고 중국 전역의 박물관을 찾아다녔다. 이 박사는 항저우, 쑤저우, 상하이, 저장 성, 후베이 성, 둥베이, 선양, 사오싱, 베이징 일대의 박물관들을 그렇게 돌아다녔다. 특히 베이징에선 역사박물관, 고궁박물관, 수도박물관의 자료실에 틀어박혀 보관된 서화와 문헌들을 일일이 들여다봤다. 7원짜리 도시락을 사 먹으면서 온종일 꼼짝도 않고 공부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뿐만 아니다. 글씨는 임서(臨書)하고, 그림도 따라 그려보았다. 따라 쓰고 그려봐야 필세나 획의 두께, 농담이나 삐침의 각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 글씨와 그림의 시대별 특징을 공부하고 인장과 종이에 관한 지식도 연마했다. 스승 양런카이는 제자에게 감정의 모든 것을 직접 가르치려 하지는 않았다.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찾아가 직접 배우도록 지도했다.

"위서체(예서에서 해서로 변하는 과정의 글씨)는 스승이 직접 가르쳤지만 다른 분야는 스승께서 써주신 소개장을 들고 찾아가 전문가의 가르침을 청했다. 공필화(세밀하게 그리는 그림)는 선양 루쉰미술학원 교수인 옌샤오샹(晏少翔)에게서, 수복표구(미술품을 복원하는 표구)는 당대의 고수인 펑펑성(馮鵬生) 선생에게서, 고증학은 인민대학 국학원 원장인 펑치융 교수에게서, 전각은 슝보치(熊伯齊) 선생에게서 배웠다."

16세기 진짜 이도다완의 발견

박물관 경매장을 오가는 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그는 한국과 중국의 그림과 글씨는 물론 종이, 안료, 낙관, 표구, 미술품 복원 등 감정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최고 수준으로 보유한 전문가 중의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렇게 혹독하게 공부한 후 이 박사는 스승의 수제자가 됐다. 그는 "스승의 외손녀가 미술사를 전공하고 상하이 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는데 선생께서 생전에 손녀에게 '감정은 이동천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좀 안정되면 손녀에게 꼭 미술품 감정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그가 한 미술품 감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도다완(井戶茶碗)'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이도다완은 조선시대에 만든 찻사발로 일본에서는 성(城)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16세기 이도다완'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다완을 감정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진작(眞作)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기에 주저했다. 괜히 감정한다고 나섰다가 가짜라고 말하기엔 심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완 사진을 본 순간 꼭 실물을 보고 싶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다완을 직접 보고 만져보니 그 대단함에 잠시 시공간을 놓쳤다. 순간적으로 우물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비파색·매화피·형태·크기·무게 등 이도다완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줬다. 현존하는 200여 개 이도다완 가운데 최고였다. 2013년 일본 네즈미술관에서 직접 봤던 74점의 이도다완들과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감정한 이 다완은 후일(2013년 11월) 일본 다도계의 큰어른인 우라센케의 대종장 센 겐시쓰(千玄室·93)에게 '5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도다완'이라는 감정을 받았다. 일본 다도의 원점인 센 리큐(千利休·1522¤1591) 15대 후손으로 수많은 명품 다완을 쓰고 감상해 온 센 대종장은 생애 처음으로 '살아 있다'라는 말로 이 다완을 찬미했다고 한다. 그도 다완의 매화피를 보며 센 리큐와 같은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이동천이 감정한 16세기 이도다완



그는 현재 서울대 대학원에서 12년째 미술품 감정을 가르치고 있다. 감정전문가로서 급속도로 변하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는 몇 년 전부터 세계 미술품 투자시장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두 가지 방향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컬렉터를 돕는 것이다. 명품을 추구하는 컬렉터가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고미술품이나 현대 작품을 소장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 가짜가 넘치는 미술시장에서 진품, 명품을 찾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진짜와 가짜에 대한 전문 지식 없이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양심을 지키는 전문가로서 컬렉터들에게 올바른 작품 감정은 물론 작품 소장에 관한 고급 지식을 제공하려고 한다. 나아가 위조나 사기에 속지 않고 세계 미술시장에서 힘 있는 컬렉터로 성장하는데 밑받침이 되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현대 작가를 돕는 것이다. 전시 기획은 물론 작가의 장단점에 따른 맞춤 프로그램과 트레이닝을 통해 미술사에 남을 예술가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나아가 작가와 의식 있는 컬렉터들과의 예술적 교류의 장을 만들어 다함께 고급문화를 즐기고 싶다."

그는 스승이 마지막 남긴 말을 인생의 지표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학문지도(學問之道), 여역수행주(如逆水行舟), 부진즉퇴(不進則退)'란 글귀다. 학문의 길이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뜻이다. 그는 지금도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인가를 되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풍수학 박사